2005년도 초여름의 일이다. 당시 사회부 경찰기자였던 나의 출입처엔 고려대도 포함됐는데, 때마침 그 해는 고대 설립 100주년이어서 이런 저런 행사들이 많았다. 그 중 메인 행사였던 국제학술대회에 세계적인 일본 철학자 가라타니 고진이 참가했다. 학교 때 몇 권의 책을 탄복하며 읽었던 터라 사건사고에 열정을 쏟아야 하는 경찰기자의 본분을 망각한 채 재빠르게 인터뷰를 신청했고, 출입기자의 특권으로 단독 인터뷰를 배정받았다.
가문의 영광을 기대하며 들어간 인터뷰는 그러나 수치로 점철된 희비극으로 끝났다. 고대에서 제공한 통역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가 명함을 주고 받으며 간단한 인사를 나눌 때까지만 유능했기 때문이다. 국격을 드높이겠다는 사명감을 안고 고매해 보이는 질문들을 준비해 갔건만, 나의 인터뷰이에게 이 질문들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그것들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 빠져나가듯 앙상하게, 핵심을 비껴, 더 정확하게는 '저렴하게' 통역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가 가라타니의 긴 답변을 초등 저학년 어휘의 단답형으로 축약해버리는 것을 보고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누군지도 모르는, 일본 장기 거주 경험이 있을 뿐인 자원봉사 학부생이 통역이었던 것이다.
세계적 석학답게 찰떡 같이 알아듣고 상세한 답변을 이어갔지만 내게 통역된 것은 그의 호의뿐이었고, 마감 임박에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40분 이상은 못 준다던 그가 세 시간 가까이 인터뷰를 해준 덕분에 '가라타니 고진이 한류 스타 욘사마를 좋아한다!'는, 이 석학의 애독자들로선 충격적인 '세기의 특종'을 하기도 했지만, 이 기사는 곱게 편집돼 온갖 동정들과 함께 '사람들'면에 실렸다. 신문이 나오면 자신의 메일로 PDF 지면을 보내달라던 그의 부탁을 나는 끝내 들어줄 수가 없었다.
오래 전 일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것은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일을 수두룩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이틀 전 문화면에 실린 한국 시인 진은영과 미국 시인 제인 허쉬필드의 대담에서도 참혹한 사태는 또 한번 벌어졌다. 단국대ㆍ수원시 공동주최의 2013 세계 작가 페스티벌에 참가 중인 두 시인에게 배정된 통역은 영문학 석사 과정 학생이었다. 두 시인은 그 자체로 시에 가까운 경이로운 시론들을 토해냈지만, 통역은 그저 사경을 헤맬 뿐이었다.
아마추어 통역들을 비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다.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한 온순한 학생들이 진땀을 흘리며 가시방석을 견디던 표정을 떠올리면 오히려 그들은 피해자라고 두둔해야 마땅하다.
세계화 시대의 부작용이랄까, 언젠가부터 우리는 우리가 외국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를 만드는 사람들, 복잡다단하고 심오한 주제를 논하는 사람들의 언어를 통역하는 것과 미국 맥도널드 매장에서 거침없이 빅맥 세트를 주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것을 자꾸 잊는다. 해당 언어를 알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게 통ㆍ번역이라고 여기는지라, 국제행사의 예산 집행 순위는 특급호텔 숙박과 고급 식당 접대가 우선이다.
다시 노벨상 시즌이다. 번역이 중요하다는 둥, 학문 기초분야 육성이 절실하다는 둥 똑같은 타령이 반복될 것이다. 노벨상이 인류의 지적 성취에 대한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는 입장과는 별개로, 그 상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이 나는 언제나 민망하다. 대학이 만일 지성의 전당이라면 경쟁 대학보다 건물 하나 더 못 지은 것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세계적 석학과 예술가들을 불러다 놓고 외국어의 무간지옥을 헤매게 한 무례에 대해 밤잠이 오지 않아야 한다.
지난해 런던한국영화제에 초대된 의 최동훈 감독은 다음 작품을 묻는 영국 기자의 물음에 "야한 영화를 찍어보고 싶다"고 했다가 "포르노를 찍고 싶다"고 통역돼 봉변을 당했다. 통역이란 그저 미모의 젊은 여성이 수행비서 비슷하게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이 땅에 창궐하고 있는 한 청자와 화자 모두를 경악케 할 이런 촌극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지구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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