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아. 교자상은 정말 골칫덩이야!"
아파트 거실에 방치된 커다란 교자상이 회의실 스크린에 떠올랐다. 지켜보던 주부 10여명이 저마다 아파트에 교자상을 보관할 곳이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자상은 제사 때나 가끔 쓰는데, 발코니를 거실로 만든 요즘 아파트엔 마땅히 둘 곳이 없는 게 사실이다.
곧이어 회의실엔 "교자상을 어떻게 수납할 것인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수납장 위치와 크기를 두고 난상토론 끝에,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쓰기 편하도록 주방 어딘가에 수납장을 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주부들은 수납함의 대략적인 스케치까지 끝냈다.
이날 스케치는 8개월 뒤 GS건설의 모델하우스에 실제 제품으로 설치됐고, 지난해부턴 GS의 모든 아파트에 적용됐다. 주부들의 아이디어를 GS가 전문지식과 기술로 현실화한 셈이다. GS는 2005년부터 주부자문단 '자이엘'을 만들어 상품 개발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아파트가 주부 손을 거쳐 각양각색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부동산 경기침체로 경쟁이 치열해진 주택시장에서 기업들이 차별화 수단으로 주부들의 아이디어를 적극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SK건설도 각각 '21세기주택위원회' '행복크리에이터'라는 주부자문단을 운영 중이다. 이들은 매달 1~3번씩 모여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예컨대 '욕실 수납공간을 확장하라'고 이달의 과제를 내면 주부들이 다음 모임에서 결과물을 발표하는 식이다.
이들의 활동을 단순한 기업홍보로 깎아 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주부들은 아파트를 보다 실용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다. 삼성이 최근 래미안부천중동 모델하우스에 선보인 '팟필러'가 대표적이다.
팟필러는 가제트 팔처럼 늘어나는 수도꼭지로 무거운 냄비를 들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를 오가는 수고를 줄인 기능 덕에 모델하우스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았다. 효과를 톡톡히 누린 삼성은 주부들의 아이디어 중 67%를 채택했다. GS도 해마다 50~70건의 주부 아이디어를 채택, 대부분을 실용신안∙디자인 등록했다.
'주부표 아파트'는 주부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불편을 해결하고자 하는 소박한 바람에서 만들어진다. SK가 최근 모델하우스 3곳에 적용한 '자전거 거치 신발장'은 자전거가 취미인 주부가 생각해냈다. 수백만원짜리 자전거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시대지만, 정작 아파트엔 자전거 둘 곳 하나 없다는 불평이 '대박 상품'을 만든 것. 삼성이 아파트 복도에 마련한 대형 수납공간이나 GS가 개발한 인출형 빨래 건조대 역시 주부들의 불만이 없었다면 탄생 못했을 상품이다.
그런 소소한 불편은 전문가들이 연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이정훈 GS건설 과장은 "아이디어 중엔 '아니 이런 게 될까?'싶은 것들도 많지만 오히려 그런 제안이 대단한 제품으로 탄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안재우 SK건설 과장은 "전문가들은 아무래도 시공 여부나 비용 문제를 놓고 따진다"고 했다.
물론 주부들의 아이디어 중엔 황당한 것도,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것도 있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때를 대비해 음식물 택배가 상하지 않도록 보관하는 '현관문 매립 냉장고'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비용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회전하는 벽에 에어컨을 설치하면 에어컨 한대로 방과 거실을 모두 시원하게 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시공이 어려워 보류됐다.
업체들은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주부들의 참신한 의견을 더 많이 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삼성물산이 주부와 실무자, 임원이 모두 참여하는 공개토론회까지 열고 있는 게 단적인 사례다. 최유진 삼성물산 과장은 "이제 전문가보다 고객의 생각을 상품화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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