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 경력의 과학교사 김모(52)씨는 수석교사로 선발돼 올해 3월 서울의 한 고교에 부임했다. 교수법 연구, 신임교사들의 수업 컨설팅 등 수석교사의 역할을 잘 해내리라 다짐했지만 부푼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에는 변변한 상담 공간조차 없었고, 수업 컨설팅을 하려 해도 교장이 “수업이나 열심히 하라”며 뭉개기 일쑤였다. 김씨는 “연구개발한 교수법을 적용할 기회조차 없어 전부 사장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학교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 경력 15년 이상의 교사를 대상으로 교장, 교감 등 관리직 대신 교수법 개발, 신임교사 지도 등을 맡도록 한 수석교사제가 교육 현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2012년 배치가 시작될 때만 해도 교육부는 2019년까지 전국 학생 100명 이상인 초중고 8,500곳에 수석교사를 한 명씩 둔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현재 1,649명까지 배정된 상태에서 교육부는 증원을 포기했고, 학교에서도 수석교사를 반기지 않고 있다. 시행 2년째인 올해 수석교사 지원자 수는 크게 줄어 전국에서 1,141명을 모집한 2011년 첫해와 달리 527명을 선발하는데 그쳤다. 충북ㆍ전북ㆍ경북에서는 미달 사태가 발생했다.
학교에서 수석교사를 기피하는 이유는 수업을 일반 교사의 절반만 하면서도 교사 정원은 1명을 차지하기 때문에 교사 정원을 추가로 얻지 못한 경우 수업을 해결하기가 어렵다. 경기와 인천을 제외한 대다수 시ㆍ도는 예산이 부족해 수석교사가 해야할 나머지 수업을 강사에게 맡겼다. 그러나 수업의 질을 따지기 앞서 강사를 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 천일중 이홍배 수석교사는 “강사는 시간당 수당(1만7,500원)이 낮아 구하기가 어렵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했다. 경기 백영고 이건홍 수석교사는 “수석교사제로 수업공백이 생기는 것은 수석교사에게도 부담”이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고교 수석교사는 “의지가 있었다면 교육부가 시ㆍ도 교육청에 지원하는 관련 예산을 확대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한정된 예산으로 수석교사제를 어떻게 운영할지는 결국 시ㆍ도 교육감에게 달린 문제”라고 말했다.
수석교사의 역할이 교감ㆍ교무부장과 겹치고 권한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도 갈등 요인이다. 박인옥 강원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는 “학교에서 떨어진 창고에 수석교사실을 만들어 주고 유배 보내는 것처럼 따돌림시키기도 한다”며 “미약한 법적 근거가 수석교사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가 일반교사를 포함한 강원지역 교사 3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강원도 수석교사제의 운영 성과 및 요구에 관한 조사 연구’에서도 교사들은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로 ‘역할ㆍ지위 상의 모호함으로 학교 관리자, 동료 교사와의 마찰(52.8%)’을 꼽았다. 지난해 전국 수석교사 70명은 ‘수석교사의 권한이 애매하게 규정된 현행 법을 개선해야 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수석교사제가 본래의 취지를 살리려면 수석교사의 권한을 법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기수 한국교육개발원 교원양성기관평가센터 소장은 “교장의 의지에 따라 수석교사제의 성패가 갈리는 현실은 그만큼 수석교사의 위치가 대단히 불확실하다는 뜻”이라며 “시행령에 수석교사의 권한을 확실히 해야 수석교사제가 현장에서 연착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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