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채도를 더욱 짙게 하고 혼자가 아님을 일깨워 주기도효용성 없어서 소중한 것이 詩여성으로서 겪은 차별과 고통 나이 들면서 포용력 갖게 돼구체적 사물 통찰하는 사유 일상적 단어 제자리 찾아줘"
다른 언어로 공감의 탄성과 맞장구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진풍경. 미국의 제인 허쉬필드(60)와 한국의 진은영(43), 두 여성 시인이 1일 수원 라마다 호텔에서 만났다. 단국대와 수원시가 공동 주최하는 2013 세계작가페스티벌에 참가 중인 두 시인은 서로의 시를 읽고 시인으로 산다는 것, 여성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시인이란 원래 그런 존재일까. 종종 답변은 그 자체로 시이기도 했다.
_서로의 시를 읽은 소감과 인상은.
제인 허쉬필드= 시가 간단 명료하면서도 흥미로운 언어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명목뿐인 시들이 많은데, 당신의 시는 진짜다. 매우 마음에 든다.
진은영= 최근 사무엘 베케트에 관해 "절약하는 언어를 통해 사유의 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한 표현을 봤는데, 선생님의 시가 딱 그랬다. 개인적 경험의 독자성을 지우고 사유를 드러내는, 사유의 힘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였다. 시의 표면에 흐르는 복잡성을 제거하고 적확한 이미지를 최소화해 사용한 것 같다.
_두 시인 모두 여성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허쉬필드= 나는 2세대 페미니스트다. 여자의 몸으로 살고 여자의 혀로 말하고 여자의 마음으로 느낀다. 하지만 시를 쓸 때는 여성이 아니라 시인이다. 이는 두 개의 분리된 세계다. 동서고금 여성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을 많이 펴냈지만, 그것은 그들이 위대한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도 여성 차별이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아닌 척하고 있지만, 문예지 수록 시인의 성비, 문학상 수상 여부 등을 따져보면 그렇다.
진은영= 선생님 시를 읽으면서 선생님 시가 원래 이렇게 온화했을까 궁금했다. 한국 여성 시인들의 시는 대개 가정이나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겪은 난폭한 경험과 차별들, 특히 가족사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한 분노를 통해 여성 화자의 고통을 드러낸다. 최승자, 김혜순 같은 시인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시인들이 60대가 되면 세계와 화해하는 징조가 보이고, 피학적이거나 난폭한 시어들은 사라진다. 선생님의 시 세계는 제 선배 시인들의 포용력과 부드러움을 가진 듯하다.
허쉬필드= 미국에서도 1970년대 매우 성난 시인들의 시가 많았다. 나는 가장 정치적인 시를 쓰던 시기가 12, 13세 때였는데, 당시 베트남전 때문에 굉장히 성난 시인이었다. 이번 페스티벌 앤솔로지 에 실린 시 '문 손잡이를 닦으며(Washing Doornobs)'는 80~90년째 사실상 전쟁 상태인 내 조국에 대해 쓴 시다. 명시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 시는 아니지만 이면적으로는 그렇다.
진은영= 한국에서는 남성 비평가들이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여성 시인들이 보여주는 구체적 사물 세계에 대한 통찰들을 부엌데기의 세계관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제인= 이런 나쁜! 나도 마룻바닥 닦고 요리하는 시 많은데. 가사일의 형이상학이라는 게 있는 거다.
진은영= 그 얘기를 하고 싶었다! 구체성과 사물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는 게 여성 시인의 특징이라는 것 맞다. 선생님은 불교에 관한 책도 많이 낸,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은 분으로 알고 있다. 불교의 세계관을 시로 쓰는 남성 시인들이 참 많은데, 선생님의 시는 그들과 달리 구체적 사물에 주목하고, 감각적인 묘사가 많다. 관념적 세계와 구체적 세계가 만나 붕 뜨지 않는 사유의 힘을 보여주는 시가 나온 것은 여성시의 구체성과 형이상학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진속불이(眞俗不二)의 불교적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다. 저도 시를 쓰면서 소박한 통찰 속에 관념적이거나 거친 사유들을 가져오고 싶다.
_현재 한국은 가장 많은 시인들이 시를 쓰고, 한 불문학자의 표현에 의하면 세계에서 시를 가장 잘 쓰는 나라이며, 시집이 그래도 아직은 많이 팔리는 나라이다. 미국은 어떤가.
허쉬필드= 시라는 개념 자체는 널리 존경 받지만 실제로 읽는 사람은 아주 적다. 미국 최대 시 축제가 격년으로 열리는 '닷지 시 페스티벌'인데, 이 축제에 4일간 매일 2,000~3,000명이 온다. 최대 발행 부수의 시 문예지는 주간 인데, 3억 인구 중 구독자는 백만명이다. 독자가 많지는 않다. 시가 대중에게 보급되는 최대 수단은 라디오와 다리 난간, 동물원, 지하철 등이다. 사람들이 시에 걸려 넘어져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니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결혼식과 장례식에서는 시를 읽는다. 그들이 시를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시를 쓰는 게 우리의 직업이다.
진은영= 동양적 사유에서는 문ㆍ사ㆍ철 통합 전통이 20세기 초까지 이沮낢?때문에 한국인에게 시 쓰기란 전인적인 삶을 완성하기 위한 실천 행위인 것 같다. 시 쓰는 일 자체를 멋진 일로 생각하는 전통이 있고, 모두 시를 써보고 싶어 한다. 시 쓰기가 자기 삶의 완성처럼 느껴지는 정서가 있는 거다. 삶과 시의 결합이 서양보다 더 견고한 것 같다.
허쉬필드= 정말 부럽다.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인은 16세까지는 모두가 시를 쓰지만 이후에는 모두 중단한다.
_대신 미국은 시를 낭송하는 문화가 한국보다 활발하지 않나.
허쉬필드= 한국에도 고은 시인이 있지 않나. 정말 대단한 퍼포머다. 무대 위에 올라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고은에 비하면 나는 기백이 없다. 나는 늘 시를 낭송하고, 그게 내 삶이다. 비행기를 타고 이곳 저곳을 다니며 시를 낭송한다. 몰래 숨어서 시를 쓰는 매우 부끄럼 많이 타는 소녀였는데, 이렇게 공연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지.
진은영= 한국은 확실히 낭송 문화가 어느 사라졌다. 옛날에는 활발했는데. 저도 시의 리듬감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보다는 강렬한 이미지에 더 관심을 가졌었다. 시 낭송 행사를 다니면서 읽는 시에서 듣는 시로 제 작품이 바뀐 것 같다.
_이 시대 시의 효용이란 무엇일까.
허쉬필드= 세 가지다. 첫째, 삶의 채도를 더 짙게 한다. 둘째, 현실을 일면이 아니라 다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당신을 해방시킨다. 셋째,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걸 일깨워준다. 당신의 고통을 나도 느꼈다고, 시인은 시를 통해 들려준다.
진은영= 효용성이 없어서 소중한 것이 바로 시다.
허쉬필드= 바로 그거다!
진은영= 무용한 것, 버려졌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삶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 시다. 그래서 거창한 단어 대신 문학적으로 깔보는 일상적 단어들을 가져다가 제자리를 찾아주고 빛나게 해주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시의 시대는 다시 도래할 것이다. 시인이 쓴 시를 많은 독자가 읽는 시대가 아니라 누구나가 자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시를 쓰는 시대로 갈 것이다. 불성(佛性)이 어디에나 있는 것처럼, 시를 쓰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감히 시인으로서 발언하고 싶다.
◆제인 허쉬필드
1953년 미국 뉴욕 출생. 프린스턴대 졸업. 등 7권의 시집 출간. 산문집 , 등을 펴냄. 미인시인아카데미 창작기금 수상.
◆진은영
1970년 대전 출생.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 2000년 등단. 시집 , , . 현대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젊은 시인상 등 수상.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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