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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산책/9월 28일] '쓴다'의 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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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산책/9월 28일] '쓴다'의 주어

입력
2013.09.2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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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선생님의 부음을 접한 밤 아무 것도 쓰지 못했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두 문장이 내 안에서 흘러나왔다.

'쓴다'의 주어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셨던 분. '쓴다'의 주어로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는 아침이다.

조너선 스펜스의 은 명말청초를 살다간 장다이(張岱, 1597-1680)를 다룬 책이다. 장다이가 48살 되던 해인 1644년 명나라 멸망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둘로 나뉜다. 전반기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쾌락'이다. 민물게 시식 동호회, 투계 동호회 등을 만들어 즐기며 놀았다. 돈도 시간도 여유로운 시절이었다. 후반기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기억'이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득세하는 와중에 그의 가문은 몰락했다. 불편한 잠자리와 거친 음식, 이웃의 비웃음과 경멸이 이어졌다. 개인에 대한 기억, 가문에 대한 기억, 국가에 대한 기억을 쓰는 일이 인생의 바닥에 떨어진 장다이에게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이유였다. 병이 들어도 변변한 약 한 첩 마련할 돈이 없었지만, 장다이는 자포자기하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했다. 삶은 내가 쓰는 문장 속에 있고 나머지는 모두 사소하다는 자세로 거대한 기억의 책을 완성한 것이다. 그는 근사한 삶의 교훈 대신 일곱 가지 인생의 역설(칠불가해·七不可解)에 닿았다. 나는 종종 차를 마실 때마다 만년의 장다이를 상상하며 그의 일곱 번째 역설을 음미한다.

"일곱째는 이렇다. 바둑을 두거나 주사위노름을 할 때 그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의 차이를 몰랐다. 그러나 차 끓일 물을 맛볼 때는 어느 샘의 물인지 능히 구분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공존했다."

고려 말, '쓴다'의 주어들 중 이숭인을 빼놓을 수 없다. 에는 시 한 편을 짓기 위해 읽고 여행하고 묻고 퇴고하는 시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역시 이기고 지는 싸움에는 능하지 않았다.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등과했으나 하옥과 유배로 긴 세월을 보냈고, 정몽주와 뜻을 같이한다는 이유로 끝내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었다. 명나라로 보내는 표문(表文)을 도맡아 쓸 만큼 글재주가 출중했으며, 차와 함께 샘물까지 병에 담아 벗에게 선물하고 또 그것을 시로 남길 만큼 섬세하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홀로 등잔불 아래 머물 땐, 정몽주, 정도전, 김구용, 이집 등을 그리워하며 그들과 함께 지낸 시절의 기억을 완려(婉麗)한 시로 옮기곤 했다.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종이에 '쓴다'고 답하던 시절에서 컴퓨터 자판에 '친다'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는다'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다큐멘터리 은 기억을 '찍는다'는 말과 매우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지율 스님은 4대강 사업으로 인해 달라진 내성천의 어제와 오늘을 카메라에 담았다. 스님은 너무나도 열심히 혼자서 천변을 걷고 산을 기어오르고 또 공사가 한창인 중장비들을 찍는다. 영화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은 조금 무심한 듯 카메라가 멈춘 채 들여다본 강이다. 모래가 흘러가며 시시각각 조금씩 바뀌는 물 속 풍광은 그 자체로 변화무쌍한 추상화다. 아름답다!

장다이, 이숭인이 글을 쓰고 지율이 다큐멘터리를 찍은 까닭은 포기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리라. 지금의 나를 만든 아름다움을 내 안에만 두지 않고 타인에게 전하기 위한 노력이 작품 곳곳에 남아 있다. 더 완벽한 작품을 위해 마음은 바쁘고 몸은 분주하다.

이숭인은 또한 적었다. "군자는 의로움에 급급하고 소인은 이로움에 급급하다. 의로움과 이로움에서 순 임금과 도척이 갈라진다." 최인호 선생님의 노작들 앞에서 질문이 많아졌다. '쓴다'의 주어가 짊어져야 할 의로움이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을 갈망하고 발견하고 창조하는데 급급한, 퇴고가 불가능한 삶 자체가 아닐까. 당신은 오늘 홀로 무엇을 쓰고 치고 찍을 것인가. 이 아름다움만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지켜내자고, 목소리 낮추어 주장할 것인가.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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