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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시국선언한 천주교 대구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영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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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의 만남]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시국선언한 천주교 대구교구 정의평화위원장 김영호 신부

입력
2013.09.2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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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강 저지' 계기로 정평위 재출범파업현장 등에 나섰던 사람들 알고 보니 대부분 가톨릭 신자교회 이름 없이 사회운동 해 온 것하느님이 원하는 건 사회주의적 가치백정도 양반도, 남자 여자도 없고인간이면 모든 것 나눌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시국선언 이후 변화에 놀라예상과 달리 많은 분들이 "이 사회가 바뀌어야…" 생각대구 시민단체들도 큰 힘 얻은 듯

하느님의 나라는 사회주의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제 몸을 불사른 전태일은 대구 사람이다. 인혁당 사건의 주요 희생자들도 모두 대구 경북지역 사람이다. 70년대까지도 대구는 정부 비판에 몸을 사리지 않는 진보적인 도시였다. 그런데 그 시절에도 대구의 가톨릭만은 보수적이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도시 전체가 보수 색채로 바뀌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민주화를 외치던 70년대에도, 바로 옆의 안동교구가 농민운동에 앞장설 때에도 대구교구는 침묵했고 전국에서 군부독재 물러나라고 외치는 87년에는 대구 전체가 잠잠했다.

그런데 대구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가톨릭 성직자 수도자들의 시국선언이 8월 14일 새누리당 대구, 경북지구당 당사 앞에서 열린 것이다. 대구교구와 안동교구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열린 이 선언에는 양 교구에서 활동하는 성직자 수도자 500여명이 참여했는데 그 중에는 대구교구의 신부 103명도 들어있었다. 대구교구가 창립한 이래 113년 역사에서 처음 터져 나온 진보적인 목소리이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전체 성직자가 380명 정도인 걸 감안하면 참여 성직자수가 꽤 많은 것도 이례적이다.

물론 이에 대한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교구청으로 쏟아지는 압박 때문에 조환길 대주교가 지난 월요일(23일) 사제연수 자리에서 시국미사를 더 이상 하지 말아달라고 사제들에게 요청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대구는 무엇이 바뀌고 있으며 무엇이 그대로인 것일까. 대구교구 정의평화위원장인 김영호 신부(50)를 만나 물어보았다. 그는 2009~2012년 대구교구 사목국장을 맡아 유명무실하던 정의평화위원회를 되살려낸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1년간의 안식년을 마치고 8월 30일부터 평리성당 주임신부로 재직중이다.

정의평화위원회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계기로 가톨릭의 본부인 바티칸이 1961년부터 교구마다 설치하도록 권장한 기구이다. 신부들의 자발적인 운동단체인 정의구현사제단과는 달리 주교회의의 공식기구이다.

대구에서 정의평화위원회는 계속 활동을 해왔습니까?

"2011년 5월30일 새로 출범했습니다. 주교회의 기구라서 형식적으로 있기는 했는데 위원장을 임명하지 않고 있었어요. 저도 91년에 서품을 받았지만 대구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2009년에 사목국장을 맡으면서 그때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 4대강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시기잖아요. 낙동강을 품고 있는 대구 경북 지역이 생태계 파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어서 2009년 봄에 명동성당에서 4대강저지 천주교 전국연대가 발족식을 할 때 저희 신부님들도 열분 정도가 참여했습니다. 내려오면서 신부님들이 우리도 뭔가를 하자고 해서 달성보 공사 현장에서 미사도 드리고 매달 성당을 옮겨서 4대강 저지를 위한 특강을 듣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 해 10월쯤에 주교회의에서 공문을 받았어요. '대구교구에 정의평화위원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정의평화위원회와 유사한 활동이 있으면 보고해달라.'주교님한테 설명을 했더니 '대구교구에도 정의평화위원회가 있다. 위원장은 없지만 기구는 옛날부터 있었다' 그러셔요. 그래서 이 참에 정의평화위원회를 새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주교님한테 말씀을 드렸더니 '누가 할 수 있겠노' 그래서 '제가 하겠습니다.'그랬습니다.(웃음) 그때 대구교구 100주년(2011년)을 준비하는 사무국장도 겸임해서 100주년 역사책 발간계획도 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추려진 내용이 전부 교구장 활동경력이 아니면 교구단위 큰행사예요. 영남지역 안에서 가톨릭신자로서 불의에 저항하고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싸웠던 분들의 기록을 남겨야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분들을 찾아서 매주 각 분야별로 보고대회를 했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교구에서 모든 사회운동단체에 가톨릭이라는 이름 쓰지 못하게 하고 교회에 발을 못 붙이게 했습니다. 그 분들이 교회는 떠났지만 교회 이름 없이 계속 활동은 했습니다. 4대강 저지 운동하는 분들과 사회운동 하는 분들이 정평위를 새로 출범시키는 토대가 됐습니다. 대구라는 곳이 재미있는 게요. 파업현장에 가서 제가 신부로서 그걸 위로하면 거기 앞장섰던 분들이 다 천주교 신자에요. 지금은 냉담(성당에 안나간다는 가톨릭 용어)하고 안 오지만. 제가 4대강 때문에 순회미사하면 거기 온 사람들이 '신부님 저희도 옛날에 신자였습니다' 그래요. 이 사람들의 사회운동에 추진력이 됐던 게 가톨릭 신앙이었습니다. 정말 이 땅에 하느님나라,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만드는데 내가 뭔가 기여를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한 분들입니다."

대학 때는 데모도 열심히 하고 사회주의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가톨릭 신앙과 위배되지는 않나요?

"제가 선입견 없이 성서를 공부해보니까 하느님이 인류가 살아가길 원하는 방식은 현존하는 개념언어로는 사회주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서를 학문적으로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한테도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을 해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자본주의를 근원적으로 비판하는 이유도 하느님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거든요."

성서에도 나오는 내용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서 열두부족이 땅을 분할을 받습니다. 각자 독립된 지방자치를 하거든요. 하느님이 원래 원하던 삶의 형태는 철저한 지방자치였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자꾸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하면서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할 수 없이 하느님이 왕을 허락하면서 굉장히 험한 말을 합니다. 너희들이 원해서 왕을 주지만 그 왕이 너희를 지배하고 착취하고 억압할 것이다. 그대로 됩니다. 지방자치를 할 때 그 분들이 개발했던 너무나 멋진 법들이 많습니다. 안식일법 안식년법 희년법이요. 안식일법은 6일동안 일하고 7일째 놀게 합니다. 노예도 가축도 다 휴식을 취하게 합니다. 그런 생활이 7년이 지나면 1년을 사람도 쉬고 땅도 쉬라고 합니다. 7년이 7번 되면 희년인데 그때는 법령으로 선포해서 노예를 풀어주고 빼앗았던 재산을 돌려주고 모든 억압된 관계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라고 합니다. 이익에 의해 생기는 불평등이 49년이 되면 모두가 원상복귀되는 이런 관계, 그래서 저는 이런 멋진 하느님을 좋아했습니다. 예수님 말씀을 듣던 직계 제자들이 만든 사회도 재산을 다 공유하고 필요한 만큼 쓰는 사회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짧지만 강력하게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 안에는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

하느님나라는 사회주의다.

"모든 신앙인들이 하느님나라가 오기를 기도하잖아요. 예수님께서 '죽어서 가는 하느님 나라'는 비유로서 설명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회가 보수화되면서 죽어서 가는 하느님나라를 더 강조하게 됐지만요. 9월이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인데요. 한국에 가톨릭이 들어와서 1만명 가까운 순교자가 생겼거든요. 순교자 중에 황일광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이 분이 백정출신인데 순교를 하면서 유명한 고백을 해요. 자기에게는 천당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죽어서 가는 곳이고 하나는 양반들 상것들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서로 친교를 우애를 나누는 이곳 교우촌이다. 백정이라는 사람이 가톨릭교우촌 안에서 느꼈던 가슴 벅찬 희망, 하느님 안에서는 백정도 양반도 남자도 여자도 없고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순교신앙이 받아들였던 가톨릭 신앙이었거든요. 그 하느님나라를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안 쓰면 뭐라고 말할 수 있느냐. 그건 사회주의 밖에 없다는 거지요."

그래도 신부가 대놓고 사회주의를 옹호하면 교구에서 뭐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학생들을 데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을 공안기관에서 지적을 했던 모양이에요. 1993년에 이문희 대주교님이 부르셔서 '러시아로 가야겠다, 준비하는 게 어떻겠나'그러셔요. 고민을 했지요. 그걸 알고 저를 아는 신부님들이 다 왔습니다. 그 신부님들이 그래요. 인사명령은 아니지만 따르는 게 좋다. 그래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래도 러시아라니 고마운 일 아닙니까? 하느님의 뜻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있어요!(웃음)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여실히 보고 와야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제가 좋아하는 러시아문학가와 작곡가를 만들어낸 토양도 궁금했습니다. 주로 생활한 데는 사할린에서 시작해서 블라디보스토크, 발칸호수 주변의 하바로브스크까지 극동시베리아예요. 강제징용자들이 끌려간 곳이자 고려인들이 와서 사는 곳. 거기를 통해 북방선교를 넓혀가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때묻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지역은 이웃과 어울리지 않으면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어요. 10월 정도 지나면 집과 집 사이에 밧줄을 하나 걸어놓아요. 눈이 3미터 이상 오니까 그때는 그 줄을 잡아서 집 사이에 터널을 뚫습니다. 저 집 가려면 요집 갔다 조집 갔다 저집 가야 합니다. 굉장히 재미있어요. 감자 몇 알도 같이 나눌 수 밖에 없고요. 봄여름가을이 5~8월 4개월밖에 없어요. 그때 협력해서 농사를 바짝 짓지 않으면 살수가 없어요. 참 행복했습니다."

사회주의의 폐해를 보고 오라는 뜻도 있었을 텐데요.(웃음)

"사회주의의 폐해도 물론 봤지요. 저는 원래부터 소련과 북한 같은 곳을 사회주의 국가로 보지 않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주사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요. 92, 93년도에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때 정신이 공황상태라는 사람들을 우리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사회주의의 운동성을 상실하고 도그마가 된 것은 당연히 무너진다고 봤거든요."

귀국은 언제 하셨어요?

"98년 2월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한국에 못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러시아에 교황청 직속 교구가 생겨났어요. 대구교구는 러시아교구가 생기기 전에 우리가 갔으니 이곳 책임은 대구가 맡겠다고 했는데 잘 안풀렸나 봐요."

귀국 후 임지를 받았습니까?

"성서공단 주변으로 아파트가 막 지어질 때 거기에 이곡성당을 지으라고 보냈어요. IMF시절이잖아요. 눈만 뜨면 신자들이 공장문을 닫고 거리로 나앉는 시절이었어요. 저도 9평짜리 임대주택 얻어서 신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살았습니다."

러시아니 신설성당이니 모두 '물먹는 부서'인데 어떻게 11년만에 사목국장이라는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갔습니까?(웃음)

"이곡성당 짓고 2002년 월드컵이 끝나갈 때 포항의 대장성당이라고 굉장히 큰 성당에 갔습니다. 그런데 전임 신부님이 6개월을 같이 살더니 2,000명을 데리고 분가하고 200명만 남더라고요. 미사 보는데 성당이 휑하니까 신자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어요. 그 사람들 달래느라고 제가 약속을 했어요. 제가 떠날 때 여기 사람들이 꽉 차있을 거라고. 2007년 2월에 제가 그 본당을 떠났는데요. 그 공간이 진짜 다 채워졌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공동체? 저는 성당이 있다면 신자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동네를 좋은 동네로 만들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신자들더러 자꾸 성당에 나오려고 하지 말고 당신들이 있는 마을로 가서 할 일을 찾아보라고 해요. 성당은 우물이다. 빨래 있으면 빨고 서로 대화하고 힘을 얻고 가잖아요. 1주일에 한번 모여서 신부님과 함께 성경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공부하고 기도하고 힘을 얻어서 돌아가면 동네를 바꿔라. 성당 안에 유기농매장도 만들고 농민들과 직거래도 하고 지역민들과 함께 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 다음에는 대구 가창성당으로 옮겼는데 여기서는 초등학교 면사무소 동사무소 농협 경찰서 소방서 모든 기관이 공동출자해서 어르신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지역사회에 기여하는 성당, 누구나 들어오는 성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지켜본 수성성당 신부님이 나중에 교구에 사무처장으로 가셨는데 새로 사목국장을 뽑게 되니까 제가 일을 못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정평위를 만들고 한 일은 뭔가요?

"생명평화 순회미사를 계속 했고요. 교회가 할 일을 가르치는 사회교리라는 게 있습니다. 보통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믿을교리와 대별되는 것인데요.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내가 어떻게 믿느냐 보다 내가 어떻게 사는가가 더 중요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사는가보다 어떻게 믿는가만 너무 신경쓰는 것 같아요. 정평위가 출범하면서 사회교리에 대한 월례강좌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4대강, 밀양송전탑 문제, 대구지역에서 가장 많은 학생자살 문제도 다루고요."

시국선언이 대구사회에 준 변화가 있습니까?

"예상과 달리 많은 분들이 이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을 확인한 게 놀랐고요. 시국선언 이후 대구 시민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습니다. 원래 싫어했던 사람은 더 싫어하지만 안 그렇던 사람들은 새롭게 보는 거 같아요. 시민단체 분들이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 분들이 자신감 있게 해나가면 대구가 또 변화되는 거 아니겠어요? 대구의 지역경제가 엄청 피폐해졌습니다. 지역자치를 살리는 것만이 살길인데 시민들이 자기의 권리를 너무 모르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개신교회에 있는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회의 목사님들을 만났고요. 정교회 신부님들 원불교 사목자들까지 모아서 범종교인 연합회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벌써 주교님이 시국미사를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반발도 만만치 않지요?

"주교님이 워낙 시달림을 많이 받으시는 것 같아요. 월요일에 대구지역 사제연수를 했는데 시국선언과 관계되는 일들을 더 이상 하지 마라, 성당에서 정치적 이야기를 하지 마라, 미사를 정치적 도구로 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해들었습니다."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요?

"주교님은 뜻이 저렇구나, 그걸 알고 행동하면 되는 겁니다.(웃음)"

실제로 사회교리를 강조하면 신자도 더 늘어나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국가적 현안에 대해서 신앙 안에서 정의롭지 못할 때 사회교리는 말하라고 하거든요. 그걸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모르겠어요. 교회가 잃을 게 뭐가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들, 불우한 사람들, 권력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면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따뜻한 집으로 여기고 찾아와요. 그런데 왜 우리는 교회를 부자들의 안식처로만 만들려고 하느냐. 이 세상의 부자들이 몇 퍼센트냐. 교회가 흔들리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말을 할 때 진짜 교회의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도 새 교황님이 밀어주셔서 힘이 되겠어요.

"네. 그 분들이 공격할 때 교황님 말씀으로 많이 방어를 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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