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무기계약직 근로자 채용엔 합격자가 이미 내정돼 있다네요."
지난 25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전남도의 기간제 근로자 A씨 목소리는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쩌면 이번 기회에 정년이 보장되는 무기계약직으로 갈아 탈 수도 있겠다'며 내심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그였다. 그러나 합격자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소문을 접하곤 또 다시 실낱 같은 희망을 접어야 했다. "이번에도 힘들 것 같다"며 전화를 끊는 그의 목소리엔 어느새 물기가 배어 있었다.
요즘 전남도청에서 일하는 상당수 기간제 근로자들의 표정은 어둡다 못해 침울하다. 도가 여성 비서요원 1명을 무기계약직 근로자로 뽑기로 하고 채용공고를 내기가 무섭게 '합격자 사전 내정설'이 나돌면서 응시 의욕마저 꺾였다는 생각이 깊기 때문이다.
도는 박준영 전남지사 비서실 여직원(기능직) 1명이 행정직으로 전환하면서 결원이 발생하자 지난 12일 비서요원을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고 23~25일 22명의 지원자를 접수 받았다. 도는 채용 공고 당시 "유능한 분들의 많은 응모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는 채용기관의 의례적 수사(修辭)였지만 비정규직 기간제 근로자들에겐 정년(59세) 보장에 퇴직금까지 받을 수 있는 무기계약직이 될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희소식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채용공고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청 여기저기서 "이번 비서요원 합격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이후 합격자 사전 내정설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고, 특정인이 합격 내정자로 공공연히 거론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실제 기간제 근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합격자 사전 내정설 정황은 더욱 뚜렷해진다. A씨는 "얼마 전 우연히 복도에서 원서를 접수하는 부서 직원들이 '이번 원서 접수자가 조금 있나 보다. 근데 어차피 누구누구가 되는 것 아니냐'며 무기계약직 채용과 관련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기간제 근로자 B씨도 응시원서를 내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해 동료 직원에게 검토해 달라고 갔다가 "이미 내정자가 있다던데 원서 접수를 할 거냐"는 말을 듣고 원서 접수를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모 고위 간부가 한 기간제 근로자의 부탁을 받고 또 다른 고위 간부에게 채용 여부 등을 물어봤다가 '이번엔 내정자가 있으니 다음 기회에 (응시)해보라'는 답변만 들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심지어 "박 지사의 부인과 가까운 영암 출신 고위 간부가 추천한 사람이 합격자로 내정됐다"는 확인되지 않은 뒷말까지 나와 해당 간부가 내정설과의 관련을 부인하는 등 어이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문제는 10월 2일 최종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합격자 사전 내정설에 대한 도 관계자들의 해명이 엇갈리면서 의혹이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도의 인사부서 관계자는 "사전 내정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경쟁률이 올라가면서 자기(기간제 근로자)들이 하는 억측이다. 시험(비서요원 채용)과 관련해서는 공정하고 깔끔하게 할 것"이라고 소문을 일축했다.
그러나 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사님 비서실의 비서를 뽑는다는 특수한 부분이 있어서'(사전 내정설이) 사실이다, 아니다'라고 말씀 드리기 뭐하다"며 "(비서 채용에 있어서)크게 문제가 안 되게 하려고 한다"고 밝혀 내정설이 사실을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간제 근로자들 사이에선 "특정인을 미리 합격자로 선정해 놓고 들러리가 필요했던 거냐"는 등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한 기간제 직원은 "합격자를 미리 찍어 놓았으면 소문이라도 나지 않게 잘 했어야지 이게 뭐냐"며 "정말 일할 맛 안 난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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