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에 한 번 꼴로 여기다 글을 내면서 속이 시끌시끌해졌다. 속에 찬 것이 없는데 자꾸 꺼내려니 왜 아니랴. 그러다 보니 자꾸 한데다 눈을 판다. 내 일만 쳐다보고 살다가 문득 남의 일도 쳐다보게 되더라는. 그런데 남들 사는 모양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의외로 참견하고 싶어진다. 나름대로 물처럼 살려고 용을 써보지만 세상은 불처럼 사는 사람들을 자꾸 보여주며 나를 충동한다.
학교 때 신문방송학을 배웠다. 그런데 배운 것 중에 신문도 방송도 기억이 안 난다. 단지 '커뮤니케이션이 참 중요하구나'만 기억난다. 4년 동안 그것만 느꼈다. 그런데 막상 밖에 나와 먹고 살다보니 미상불 '커뮤니케이션이 참 중요하구나'만 느낀다. 음... 3자회담의 전말을 보면서도 그랬다.
커뮤니케이션은 주지하듯 발신과 수신이다. 서로 오고가고하면서 잘 통하면 그야말로 좋다. 어정쩡하다. 수발신이 왕복운동을 하는 동안 생각이 꼬리를 물어 합쳐지고 난제는 풀어지면서 화학적인 상승효과가 난다. 그래서 좋은 커뮤니케이션은 물리의 한계를 간단히 넘어선다. 연극을 하면서 이것을 자주 느꼈다. 연출과 배우, 작가와 스탭은 노상 그 문제로 골몰한다. 커뮤니케이션이 연극의 전부라고 해도 넘치는 말은 아니다.
이번 3자회담은 내 협량한 관점으로 볼 때 선량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그런 구조가 아니다. 수발신의 타겟이 모호하거나 누군가는 그럴 의향도 없어 보였다. 3자회담은 똑같이 3분의1씩을 배타적으로 가질 포부가 있거나, 1을 만들기 위해 3분의 1씩을 양보해야 하기 일쑤다. 물론 말처럼 이상적이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만났으면 이야길 섞어야 했다. 일단 둥근 테이블에 앉았으니까. 누가 힘이 더 세고 아쉬운가는 일단 배제하고 이번 사례를 보자. 여당과 대통령은 숫자상으로 3분의 2를 가질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 권리를 가져가는 과정에서 바이어스(Bias·편견)가 생길 가능성이 농후하다. 누가 봐도 어느 둘은 이야기를 거들 수 있는 같은 편이다. 다시 말해 2대1이다. 대화에서 추임새의 리액션이 얼마나 저력을 발휘하는가. 둘이 모이면 둘 이상의 힘이 되기 마련이다. 누군가는 기가 죽거나 소외되어 상기될 것이 불문가지다. 아니나 다를까 회담 끝나고 퇴장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3분의1도 챙기지 못한 다른 하나의 고독을 느꼈다. 둘은 붙어있었고 하나는 분명 떨어져 있었다. 한 편은 피로감도 없어 보였고 다른 한쪽은 지쳐있었다. 그 애매한 거리며 어정쩡한 걸음이란!
작가와 연출도 다름 아니게 대체로 갈등한다. 주로 극본을 수정할 때가 그렇다. 서로의 관점이 비슷한 듯 달라서 그걸 절충하는 게 의외로 간단치가 않다. 이렇게 상충될 때는 제작PD의 역할이 중요하다. PD가 지혜롭게 중재하면 극본의 수정은 제대로 가닥을 잡아간다. 하지만 PD가 중심을 놓고 어느 쪽에 쏠려버리면 대체로 탈이 난다.
이번에는 특히 대화의 원칙이 있어야 했다. 가령 연극으로 치면 '이 장면은 무조건 합의하자'라는 원칙 말이다. 개인의 원칙 말고 3자회담의 원칙 말이다. 상대방과 어떻게든 합의에 이르겠다라는. '단순히 각자의 입장이나 생각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하는 식은 그 모양과 형편이 정황적으로도 이치에도 한참이나 모자란다. 1시간 30분이 대수인가. 될 때까지 하는 거다. 하찮은 극본회의도 새벽을 꼴딱 넘긴다. 동 틀 때쯤 돼서야 감정이 빠지고 본질이 남는다. 서로가 더 애를 써야 했다. 결국 불처럼 타올라서 배수진을 치더니 토너먼트로 대번에 승부를 갈랐다. 뜻하지 않게 원탁의 승부사들을 보았다. 그런데 승자가 안 보인다.
물은 밟히지 않는다. 밟아도 밟히지 않으니 흘러 큰 강이 된다. 물 흐르듯이 할 수는 없었을까. 정색하고 밟으려, 안 밟히려는 그 표정들이 사나와서 보기에 안 좋았다. 절도가 있으나 유연한 커뮤니케이터들이 하는 정치, 보고 싶다.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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