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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발길 다시 품은 제주 서쪽 끝 무인도 차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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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발길 다시 품은 제주 서쪽 끝 무인도 차귀도

입력
2013.09.2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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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도라는 낱말 속엔 끌림이 있다. 그건 먼 은하에 속한 별의 인력처럼 뜬금없이, 그리고 속수무책 내가 발 디딘 땅의 중력을 왜곡시키고 마는 노스탤지어와 같을 것이다. 무인도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 그래서 육하(六何)의 이유는 없어도 된다. 무인도라는 낱말 속엔 또 늘 바람이 일고 있어서, 무ㆍ인ㆍ도 세 음절이 발음될 때, 입술은 바람이 표착할 곳을 가리키는 풍향계 날개가 된다. …… 대책 없는 값싼 낭만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모름지기 무인도로 가는 배를 탈 땐, 배낭 속에 이런 싸구려 낭만이라도 챙겨 넣어야 하는 것이다.

차귀도는 제주도에 딸린 섬 가운데 가장 큰 무인도다. 마음만 먹으면 복잡한 절차없이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무인도이기도 하다. 피해 다녀도 어쩔 수 없이 북적북적한 공간 속에 갇히곤 하는 제주도 여행에서, 맘껏 센티멘털해질 권리가 보장된 곳이 차귀도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저녁마다 무자맥질하는 해를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제주도의 서쪽 끝, 한경면 고산리 자구내포구 앞바다에 떠 있다. 거기서 쾌속선 타고 10분이면 간다.

오랫동안 차귀도는 낚시꾼들이나 이름을 아는 섬이었다. 섬 전체가 '차귀도 천연 보호구역(천연기념물 제422호)'으로 지정돼 출입이 금지됐다가 2011년 말 탐방로를 닦고 여행자에게 개방됐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이 섬의 낮은 인지도는 궁금증을 갖게 한다. 일몰객이 끓을 법한 목 좋은 위치나 제법 넓은 면적(0.16㎢)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아니, 이만한 섬을 왜 무인도로 놔뒀을까 하는 의문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대답을 들었다. 자구내포구 마을에 사시는 김창보(69) 할아버지 말씀이다.

"1974년이지? 추자도에 간첩단이 든 게. 그 일 나고 10가구가 안 되는 섬은 다 무인도로 만들라는 소개령이 내렸어요. 우리집이 마지막 남아 있던 세 집 중에 하나에요.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칠남매를 다 거기서 낳으셨는데…."

애초 무인도였던 섬이 아니라 사람이 무인도로 만든 섬이 차귀도였다. 기록을 뒤져봤다. 차귀도에 처음 사람이 든 건 1911년. 고산리 살던 강씨 집안이 뗏목을 만들어 타고 대나무만 무성하던 무인도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흙과 돌을 쌓아 벽을 세우고 대와 띠를 잘라 묶어 지붕을 만들었다. 고기 잡고 해초 뜯어먹고 살다가 땅을 일구어 조, 보리, 콩, 고구마를 심었다. 의외로 농사는 잘 됐다고 한다. 감자나 참외를 심으면 씨알이 '덩드렁막개(제주에서 짚을 두드리는 방망이)' 만한 놈을 거둘 수 있었단다. 소문을 듣고 자구내포구에서 뗏목을 띄우는 집이 하나 둘 늘었다. 김 할아버지의 증조부도 그 중 한 분이다.

"우리 증조 할아버지가 본래 곽지에서 훈장 선생님까지 하신 분이에요. 그래도 별 수 있나, 갈아먹을 땅이 없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대에 와서는 소도 몇 마리 키울 만한 살림이 됐어요."

바위벼랑으로 둘러싸인 섬을 오르기가 만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포구에서 10분 가량만 비탈길을 걸으면 제주에서 가장 호젓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전깃줄과 과속방지 카메라와 테마파크의 네온 간판이 없는 제주의 민낯. 간첩단이 이곳까지 밀려올 수 있었던 시절엔 제주의 얼굴이 모두 이러했을까. 섬의 표정이 아늑하고 고요했다. 바다 쪽으로 노출된 지형은 거칠지만, 그 날카로운 윤곽 속에 움푹하게 담긴 지형은 누긋했다. 갯무, 갯매꽃, 갯기름나물, 갯채송화, 갯장구채 등등 이름에 '갯'이 붙는 온갖 풀이 자생하는 들엔, 지금 억새가 푸르렀던 기운을 떨어내고 있었다. 곧 잿빛 바람으로 일렁이게 될 들이다. 바람을 막아줄 건 맞은 편의 바람밖에 없어서, 차귀도에선 몸을 덮은 옷이 목선의 돛처럼 펄럭인다. 모자 썼다면 턱끈을 단단히 조여야 한다.

"저건 송이채에요. 해수면이 지금보다 낮은 시절에 폭발했다는 증거죠. 바로 옆의 장군석은 용암이 굳은 거고요. 또 옆의 화산쇄설 퇴적층은 여기서 여러 번 폭발이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거에요."

동행한 해설사 이명숙씨는 차귀도의 지형에 대해 해 주고픈 말이 많은 듯했다. 지질학 지식이 짧더라도 이 조그만 섬에서 지구가 참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해안 절벽에 3개의 독립된 분화구가 있다. 섬의 가운데도 분지도 척 봐도 분화구다. 그런데 애써 찾아간 무인도에서, 그런 자연의 조화보다 검질긴 사람의 흔적이 눈길을 끈 까닭은 무엇일까. 섬엔 물이 없었다고 했다. 빗물을 받아 먹다 부족하면 뗏목을 저어 큰 섬에 가서 물을 길어왔단다. 그 고된 세월 끝에 '징게돌이'라는 해안에서 용천수를 발견했다. 이씨가 용천수 우물이 있던 곳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우물이 밀물 파도에 덮여 있었다.

저렴한 공산품 같은 낭만이나마 흠뻑 취해볼 요량으로 들른 무인도에서 괜스레 이런저런 생각만 많아져서 떠나는 배를 탔다. 수만, 또는 수십만 년 차귀도의 역사에서 사람이 살았던 시간은 가난에서 시작해 간첩으로 〕ご?60년 남짓이 전부였다. 그러나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 풍경 너머의 풍경으로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람이 살았던 세상의 풍경이 모두 그러할 것이다. 해서 무인도란 본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 지도에서 주소가 사라진 이 섬의 이름은 차귀도다.

[여행수첩]

●차귀도는 하루 100명에 한해 탐방이 허용된다. 하지만 아직 탐방객이 많지 않아 예약하지 않고 찾아가도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차귀도 탐방과 유람선 관광을 묶은 여행 상품이 판매 중이다. 어른ㆍ청소년 1만6,000원. 어린이 1만3,000원. 제트보트를 타고 차귀도의 아름다운 해안 절벽에서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상품도 판매한다. 어른 2만5,000원, 청소년ㆍ어린이 2만원. 차귀도 뉴파워보트 (064)738-5355

제주=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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