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마디 사이사이 매번 웃음이 흘렀다. 어느 때보다 가벼워 보였다. 말도, 몸도, 마음도 무게를 덜어낸 듯 했다. 2011년 은퇴 소동 이후 메가폰을 멀리 밀쳐놓았던 이준익(53) 감독을 24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신작 '소원'의 개봉(10월2일)을 앞두고 있다.
예전보다 이 감독의 말과 행동이 더 경쾌해졌지만 '소원'이 다루는 소재는 무겁고 어둡다. 성폭행을 당한 초등학생과 피해자 가족이야기가 스크린을 채운다. 평범하지만 행복했던 일상을 찾고자 하는 가족의 분투가 눈물을 부른다. 몹쓸 짓을 당한 뒤 남자라면 아빠도 멀리하던 소원(이레)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낸다. 영화는 범죄자에 대한 사회적 공분을 불러내면서도 따스한 인간미에 방점을 찍는다. 과장되지 않은 연기로 소시민 부모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려낸 설경구와 엄지원의 연기가 뜨거운 눈물과 잔잔한 웃음을 자아낸다. 이 감독의 전작들 중 굳이 비교하자면 '라디오 스타'의 정서에 맞닿는 영화다.
이 감독은 처음 시나리오를 접했을 때 이 영화를 연출할 마음은 없었다. "읽다 덮고 읽다 덮고"를 반복할 정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시나리오의 후반부가 이 감독의 마음을 잡아 끌었다. "인간 관계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를 버리고 작가의 바람을 온전히 운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흥행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순하다고 여기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찍으려"고 했다.
그래도 "(23일) 시사회가 열리기 전까지 마음이 아주 조마조마했다"고 말했다. "민감한 소재가 사람들에게 잘못 전달될까"하는 우려가 그의 마음을 옥좼다. 시사 이후 반응은 좋다. 이 감독은 "지인들의 (축하) 휴대폰 문자가 쇄도한다"며 파안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은 '(새)데뷔작이 짱입네다. 나도 새로 데뷔할라고요'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영화의 후반작업을 할 때 편집기사와 녹음기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일했다"고 하니 시사회 뒤 호응은 이미 예견된 듯. 이 감독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우는데도 웃음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웃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따스해서, (주인공들이 일상을 찾게 돼서) 다행이다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올해는 그의 감독 데뷔 20주년이 된다. 그는 1993년 도둑을 퇴치하는 아이들의 활약을 그린 '키드캅'으로 제작자에서 감독으로 변신했다. "'키드캅'이 쫄딱 망한"(P 감독)뒤 이 감독은 10년 동안 감독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2003년 "하겠다는 감독이 아무도 없어" 자신이 제작한 '황산벌'을 연출했고 이후 그는 8년 동안 '왕의 남자'와 '님은 먼 곳에' 등 7편의 영화를 연출하며 대박과 쪽박의 롤러코스터를 탔다.
이 감독은 "'평양성'이 흥행에 실패하면 더 이상 상업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말한 뒤 메가폰을 내려 놓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2년을 쉬었다. 피렌체와 이스탄불 런던 등 영화제 유람을 다니며 철저하게 놀았다. 촬영현장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그는 "뭐든지 억지로 하지 말자. 강한 주장 자체가 폭력"이란 깨달음을 얻었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과 '평양성'(2011) 등 통해 정치와 사회를 논하고자 했던 때에 대한 반성도 했다. "내 논리가 어설퍼.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과 '평양성'은 생각으로 만든 영화야. 앞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영화는 안 할거야.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지 이성으로 살고 싶지 않아. 이젠 마음이 동하는 대로만 영화를 만들 거야."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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