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임박했다고 부담을 느끼는 편은 아니에요. 연습하면서 음악가들과 나 사이에 이미 공유된 것들이 많으니까. 오히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첫 인사를 나눌 때 연주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 때문에 긴장이 되곤 하죠.”
영국 국립오페라단(ENO) 무대 데뷔를 앞둔 지휘자 김은선(33)씨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김씨는 30일부터 11월 6일까지 공연되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오페레타 ‘박쥐’의 지휘를 맡아 한국인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ENO 공연에 참여한다. 극장이 위치한 ‘코벤트 가든’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왕립오페라단과 더불어 ENO는 영국을 대표하는 오페라단이다. 모든 대사를 영어로 바꿔 노래하는, 영국인의 자부심이 담긴 단체다.
연세대와 독일 슈투트가르트 음대에서 수학한 김씨는 2008년 스페인에서 열린 헤수스 로페즈 코보스 국제오페라지휘콩쿠르에서 우승했고 부상으로 마드리드 왕립 오페라극장(테아트로 레알)의 부지휘자로 활동했다. 이 극장의 설립 160년 역사상 첫 여성 지휘자였다. 이후 빈 폴크스오퍼, 오스트리아 그라츠 극장,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등에 섰다. 런던에서 리허설에 한창인 그를 19일 화상전화로 만났다. “어딜 가나 그저 신기해 하는 반응이죠. 여자인데다 한국인이니까. 정명훈 선생님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유럽인이 한국인 지휘자를 만날 일은 거의 없죠.”
긴 생머리, 앳된 얼굴의 김씨는 “아직 여성 지휘자가 소수이기는 해도 남성 지휘자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남자가 돼 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고 말했다. “한때 저도 연주자들에게 강하게 보이기 위해 남자처럼 머리를 짧게 자른 적이 있어요.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제가 남자가 되는 건 아니죠. 제 긴 생머리가 저만의 개성으로 비치기도 한다는 걸 지금은 잘 알아요.”
4세 때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며 음악가의 꿈을 한동안 접었지만 작곡과에 진학했고 이후 상상도 못했던 지휘자의 길을 선택했다. “중요한 시기에 늘 훌륭한 멘토를 만나 왔다”고 한다. “대학교 4학년 때 ‘지휘법’이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치신 최승한 교수님께서 지휘를 추천하셨어요. ‘삶이 어려워질 텐데 한국에서 여학생에게 지휘를 하라고 해도 되는 걸까’ 고민하셨다는데 지휘에 매료된 저는 대학원 원서 접수 마감 사흘을 앞두고 진로를 바꿔 지휘과 대학원에 진학했죠.”
이번 공연 이후로도 그의 일정은 ‘여자’를 테마로 세 편의 오페라 지휘를 모두 여성 지휘자에게 맡긴 이탈리아 마체라타 오페라 페스티벌 50주년 기념 무대 등을 포함해 2015년 초까지 꽉 차 있다. 오스트리아 빈에 거주하는 그가 1년 중 집에 머무는 시간은 4개월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소리는 연주자들이 내는 것이기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김씨는 음악 못지않게 어학 공부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영어와 독일어, 스페인어, 이탈리어를 구사하는 그는 요즘 불어를 새로 배우고 있다. “작곡가들이 자신의 말과 리듬을 토대로 음악을 쓰기 때문에 언어를 정확히 구사하지 못하면 음악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언어 연구는 언젠가 다시 펼칠 오페라 작곡의 꿈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한국어가 사실 노래할 때 잘 들리는 말은 아니거든요. 이탈리아, 독일 오페라 열심히 익혀서 언젠가는 성악가들이 부르기 쉬운 한국어 오페라를 써야죠.”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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