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는 '비디오아트'로 분류될 만한 작품들이 자주 전시된다. 5분짜리도 있고 30분짜리도 있다. 나는 이 작품들 앞에 얼마쯤 머물까 망설이곤 한다. 시작 시간이 따로 없으니 중간부터 보기 마련이고, 조용한 전시회라도 개방된 장소라 다소간은 어수선하다. 그럴 땐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게 낫지 않나? 한편 영화제에 가면 이야기가 해체된 실험적인 영화들을 종종 만난다. 내내 숲을 스치는 바람뿐이기도 하고 내내 요란하게 널뛰는 카메라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기도 한다. 이런 영화들은 딱히 시작이 시작인 것도 끝이 끝인 것도 아니다. 나는 이렇게 갸웃거리곤 한다. 영화관보다는 미술관 전시회에 더 어울리지 않나?
이래도 아쉬움 저래도 아쉬움. 미술관에서 나는 공간에 몸을 맡겨야 한다. 특정한 자리를 점유하는 작품 앞에 원하는 만큼 머물다 간다. 반대로 영화관에서 나는 시간에 몸을 맡겨야 한다. 가만히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스크린에 집중한다. 아마 내 아쉬움은 그 때문인 것 같다. 공간이라는 틀을 넘어서려는 비디오아트 작품들이 여전히 공간적 구조에 묶여있다는 것. 시간의 속박을 넘어서려는 실험영화들이 영화관이 강제하는 시간에 묶여있다는 것. 주어진 한계를 떨쳐낸 자유로움이 아니라, 그 한계와 고투한 흔적들이 거기 있다. 그 '흔적'이, 삶의 시간적 공간적 형식에 대해 오래 생각토록 만든다. 예술이란 그런 '흔적'일지도 모른다.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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