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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9월 14일] 사관 이전에 졸속이 문제다

입력
2013.09.1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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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요? 국민을 개~ 탄압한 독재자지 뭐."

아이들에게 '개'는 부사로도 쓰인다. 대충 '매우'와 비슷한 의미로 활용된다. '개 이쁘다'는 '매우 예쁘다'는 뜻인 셈이다. 그러므로 '개 탄압했다'는 '혹독하게 탄압했다' 쯤 되는 거다. 중학에 다니는 아이는 언젠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렇게 단정했다.

애들이 이런 식으로 배워서야 쓰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망아지 같은 아들 앞에선 누구나 소박한 아버지에 불과하다. 사관(史觀)의 적절성에 앞서 과거로부터는 전범(典範)을, 남의 허물을 캐기 보다는 좋은 점을 보는 걸 배우길 바란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도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 정치가지만, 웅지(雄志)를 펼쳐 한강의 기적을 일군 지도자' 정도로 인식되길 바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노벨상 받으려고 뒷돈 갖다 바치고 구걸했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학사 고교 한국사교과서가 만들어진 데는 필자 비슷한 수많은 부모들의 소박한 바람이 작용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한결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나, 강화도조약 체결에 고종의 긍정적 인식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술(記述)한 것 등을 두고 친독재니, 친일사관으로 굳이 매도하며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서는 세태가 탐탁하지는 않다. 현재 검정을 통과한 8종의 고교 역사 교과서 중 7종이 진보 성향이라고 한다면, 1종의 보수 성향 교과서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사관이나 역사 기술은 결국 사실(史實)에 대한 인식과 해석의 문제다. 사관에 간극이 있다면 학계가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사실에 대한 평가와 해석의 논리적 정합성을 다퉈 보편성에 다가가는 게 맞고, 그런 과정에서 보편적 인식에서 벗어난 역사 교과서 역시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따라서 교학사 교과서의 사관을 두고 온 사회가 나서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식의 다툼을 벌이는 건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이번 논란을 보면서 정작 개탄스러운 건 사관을 따지기조차 부끄러운 사실 오류와 무책임의 문제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독립운동가 김약연 선생을 '김학연'으로 쓴 것 정도는 오기여서 발견하는 대로 고치면 된다. 하지만 인터넷에 뜬 엉뚱한 인물 사진을 6ㆍ25 전쟁 당시 이우근 학도병이라며 올린 사례 등은 교과서 집필과 편집이 얼마나 안이하게 진행됐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은 그 하나만으로도 머리 숙여 사과해야 마땅하다.

문제는 그런 예가 비단 교학사 교과서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데 있다. 2011년엔 '아리랑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 1위에 선정됐다'는 턱도 없는 내용이 초등학교 4학년 도덕 국정교과서에 수록된 게 밝혀져 문제가 됐다. 인터넷에 떠도는 얘기를 확인조차 없이 교과서에 그냥 올린 것이었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최근 열린 MBC '100분 토론'에 진보 역사학자로 나온 한 사람은 자신이 교과서에 기술한 '파월 한국군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했다'는 내용의 근거를 대라는 보수 학자의 요구에 대답도 못했다. 충분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의도적 '학살'이라고 사료로써 인정할 만한 근거 없이 그렇게 썼다면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다.

검인정제도가 도입되면서 교과서 제작의 엄정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지적이 한두 번 나온 게 아니다. 교과서는 출판사들이 검인정만 통과하면 안정적으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로또상품'이 됐다. 기획과 집필, 편집은 돈이 적게 들어가는 졸속으로 진행되고, 일단 검정을 통과하면 수정과 보완은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교재로써 문장의 어문학적 적절성 같은 걸 따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역사 왜곡으로 욕 먹는 후쇼사 역사교과서를 만드는데 일본 우익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투입한 직접 준비기간만 10여 년이라고 한다. 반면, 7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국내 검인정 교과서 제작에 걸린 기간은 평균 6개월에서 1년여에 불과했다. 차제에 교과서 제작 및 유통 시스템 전반을 수술할 필요가 있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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