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은 여사원이 상사 앞에 서 있다. 나이 지긋한 상사의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슬리퍼 사이로 튀어나온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상사가 묻는다. "너 옷이 그게 뭐냐?" 일시에 주변의 눈길이 쏠린다. 여사원의 파격적인 옷차림을 두고 뒷말은 많았지만 면전에서 지적한 사람은 처음이다. "이 옷이 왜요?" 상사의 미간이 더욱 일그러진다. "몰라서 묻냐? 그렇게 짧은 옷을 입고 외부 사람 만나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여직원이 지지 않고 대답한다. "짧다고 해서 단정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누추하게 입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 말에 상사의 눈이 문득 자기의 구겨진 폴로 셔츠와 무릎 튀어 나온 면바지로 옮겨 간다. '튀지 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지만 꺼낼 수가 없다. 그렇잖아도 자신이 사무실에서 '꼰대'에 '마초'로 찍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무실 복장을 둘러싼 이 흔한 풍경은 대한민국 여론을 사분오열로 찢어 놓는다.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가 갈리고, 여성과 남성이 충돌하며, 자유로운 영혼과 조직형 인간이 대립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찢어진 청바지가 마음에 안 들지만 제지할 근거를 찾지 못해 답답하다. 꽃무늬 치마를 고집하는 사원도 그럼 왜 핫팬츠를 입고 출근하는 건 망설이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적합한 사무실 복장이 무엇인지에 대한 좋은 대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답해야 할 질문이다.
반바지 입지 말라고 왜 말을 못해
지난달 29일 롯데백화점이 비즈니스 캐주얼 입기 캠페인을 전면 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비즈니스 캐주얼은 어느 정도 격식을 차린 캐주얼 복장으로, 면 재킷, 면 바지, 캐주얼한 남방 셔츠가 대표적이다.
국내 대기업의 복장 간소화는 삼성전자가 2008년 '넥타이 푼 삼성'을 선포하면서 본격화했다. 앞서 LG전자, 코오롱 등이 암암리에 복장 규제를 완화해왔지만 모든 사업장에 비즈니스 캐주얼을 공식 복장으로 제안한 것은 삼성이 최초다. 같은 해 신세계백화점도 전 사원에게 비즈니스 캐주얼을 허용한 데 이어 2011년에는 청바지와 티셔츠까지 허용하는 파격을 보였다. 그리고 비로소 올해, 대기업 중에서도 보수적이기로 소문난 롯데백화점마저 비즈니스 캐주얼 권장 캠페인을 열면서 딱딱한 정장과의 이별을 고했다. 신헌 롯데백화점 대표는 직접 파란색 면바지와 체크무늬 재킷을 입은 사진까지 공개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대형 유통사가 비즈니스 캐주얼을 강조하는 데는 물론 다른 속내가 있다. 정장 매출이 줄고 캐주얼 판매가 늘자 비즈니스 캐주얼 붐을 조성, 더 많은 면 바지와 남방 셔츠를 팔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이 어떻든 지난 몇 년간 국내 대기업들의 복장 규정은 공통된 지점을 향하고 있다. 완화 내지는 자유다. 복장 지침을 들여다보면 자유로운 복장을 허용함으로써 직원의 창의성을 진작시킨다는 등 달콤한 말들 일색이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긴다. 지난 수년간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무실에서는 복장에 대한 날 선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한편에서 복장 자율을 외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고삐를 죄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 왜 복장을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은 공개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넥타이의 중요성과 치마 길이에 대한 보수적인 시선은 왜 암묵적으로만 오갈까? 복장 규제란 단어에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반감은 무엇 때문인가.
드레스 코드 미워하는 사회
"한국은 유독 T.P.O.(옷을 상황에 맞게 입는 것)에 약합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같은 큰 행사 외에는 장소에 어울리게 입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죠."
김미경 이미지연구소 소장은 의복과 상황을 연계해서 생각하지 않는 문화가 사무실 복장 규제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문화의 기저에는 옷차림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속물로 여기는 정서가 깔려 있다. 술자리에서 주도를 지키지 않은 이에게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장소에 맞는 복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 되려 겉치레가 심하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패션에 대해 1면을 포함, 4개 지면을 할애해 분석한 것을 두고 작은 논란이 있었다. 비난의 주 내용은 "박 대통령의 외모를 칭찬함으로써 정권에 아부했다"는 것이었지만, 그 아래에는 그깟 옷 얘기에 중앙 일간지가 4개 면을 쓰는 것이 마땅하냐는 의문이 있었다. 해당 신문이 전제한 '상황과 장소에 어울리는 옷차림의 중요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좋은 패션이란 아직까지는 검소한 옷이지, 상황에 맞는 옷은 아닌 것이다.
상명하복문화에 대한 거부감도 사무실 복장 규정의 걸림돌이다. 한국 사회에 강력하게 잔존해 있는 위계 문화는 '권력에 항거하는 것이 정의'라는 대중의 강박과 수시로 부딪힌다. '권력=악, 저항=선'의 도식이 '복장규제=악, 자율복장=선'으로 바뀌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적합한 사무실 복장은 권력에 대한 굴종과는 무관하다. 를 쓴 칼럼니스트 아라 씨는 "직장 생활에서 옷으로 알려야 하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닌 나라는 직원"이라고 말한다. 결국 문제는 개인과 사회 간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사회 생활에 목숨을 걸든, 언제라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일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사람들이 회사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가늠할 때 요긴하게 쓰는 기준 중 하나가 그가 입고 있는 옷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넥타이 풀어도 된다는 말에도 꾸역꾸역 넥타이를 맴으로써 '조직에 간과 쓸개를 내놓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덥수룩한 턱수염에 가죽 재킷을 입어 '퇴근 후엔 전화하지 말라'는 무언의 말을 건넬 수 있다.
무엇이 됐든 개인의 옷이 뿜어낸 이미지는 온전히 그 자신이 감당할 몫이다.
복장 규제, 하려면 제대로 해야
복장 규정의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회사가 구체적인 지침 하달을 망설이는 마지막 이유는 무식함이다. 복장에 대한 공식 지침이 없는 회사의 경우 복장 규정은 관행과 눈치에 의해 지배된다. 관행이란 대부분 윗사람이 옷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반영돼 만들어지는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바지는 수수한 것, 치마는 멋 부린 것, 빨간색은 화려, 검은색은 무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이다. 무엇이 사무실 복장으로 적당한지에 대한 철학이나 지식없이 그저 눈에 익은 것은 선호하고 낯선 것에는 눈살을 찌푸리니 복장 규제에 대한 반발이 들끓을만하다.
앞서 예를 든 상사와 부하 여직원의 경우 기업의 성격에 따라 여사원의 치마가 부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상사의 옷차림이다. 폴로 셔츠든 드레스 셔츠든, 구겨진 것은 상식적인 사무실 복장에 어긋난다.
김미경 소장은 "합리적인 복장 지침을 위해서는 우리 옷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양 복식에 대한 이해와 한국 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한다. 대기업들의 복장 규정은 서양의 비즈니스 캐주얼을 조금 보수적으로 각색한 수준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 한국 정서가 반영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다리 노출에 관대한 데 비해 가슴 노출에는 예민한 분위기라든지, 등산복이 중년 캐주얼의 핵심을 차지하는 상황이 그것이다. 중년 남성들이 편안한 복장으로 티셔츠나 면 바지가 아닌 등산복을 더 선호한다면 사무실 복장을 간소화할 때 참고할 만하다.
중요한 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장을 규제할 수도, 무작정 자유를 외칠 수도 없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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