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의 시에 ‘안개 속에서’라는 작품이 있다. 독일어가 아니라 우리글로 발음을 써놓고 읽어도 좋은 시라는 게 느껴진다.
젤트잠, 임 네벨 쭈 반더른
아인잠 이스트 예더 부쉬 운트 슈타인
카인 바움 지이트 덴 안더른
예더 이스트 알라인(하략)
이 시의 핵심이 되는 것은 맨 끝에서 세 번째 행에 나오는 ‘레벤 이스트 아인잠자인’, 삶은 고독하다는 것이다.
안개 속에서 모든 덩굴과 돌은 다 외롭고 나무는 서로 다른 나무를 볼 수 없다. 모두가 다 혼자다. 이 시의 여운이 강한 것은 젤트잠 아인잠처럼 고독과 함묵을 알려주는 ㅁ으로 된 시어를 통해 인간을 홀로 격리시키는 어둠(안개)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 이청준도 어느 작품에선가 판토마임(무언극)이라는 말이 ㅁ으로 끝나기 때문에 판토마임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을 ‘안개 안에서’라고 바꾸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는 안개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게 되고, 안개 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던 것들을 이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될 것 같다.
배호의 노래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은 ‘가슴 깊은 곳에 참았던 눈물이 야윈 두 뺨에 흘러내릴 때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이라고 끝나는데, 사랑이 안개 안으로 가버린다면 다시는 찾지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그 사랑은 이미 안개와 함께 기화(氣化)됐을 것 같다.
그런가. 안과 속에서 이런 차이를 느끼는 건 옳은 감각인가. 5공화국 당시 필화사건에 휘말려 모진 고문을 당한 박정만이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병고에 시달리다 1988년에 42세로 숨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시는
나는 사라진다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겨우 열다섯 자다. 이른바 종시(終詩)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저 광활한 우주 속을 우주 안으로 바꾸면 제 맛이 날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안의 반대는 밖이고 속의 반대는 겉이다. 바꿔 말하면 내외와 표리의 차이다. 내외는 유별해야 하고, 표리는 부동(不同)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몸에는 안도 있고 속도 있다. 술을 너무 마시면 속이 쓰리고 아프다. 자식이 제대로 사람 구실을 못하면 부모는 속이 상하고 속이 썩는다. 이렇게 속이 들어간 말을 쓰다 보면 속은 곧 내장이라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안은 뭘까? 안은 마음이다. 그걸 잘 알게 해주는 게 단종을 귀양지인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온 금부도사 왕방연의 시조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종장에 나오는 ‘내 안’은 중장의 ‘내 마음’과 중복되지 않게 말을 바꾼 것이다.
국어학자 권덕규(1890~1950)는 집을 팔아 술을 사 마신 분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어느 날 대취하여 집 앞에 돌아와서는 “너 이놈, 괘씸한 놈. 내 비록 지금껏 네 속에서 살았지만 이젠 네가 내 속에서 살 것이다.”라고 소리를 쳤다지? 그런 남편과 함께 사느라 그 부인은 얼마나 속을 썩고 늘 애를 태웠을까? 안타까움에 애간장이 다 녹지 않았을까?
안이 마음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에는 ‘애가 타고 마음이 갑갑하다’는 안쓰럽다가 있다. 어떤 사전에는 ‘안슬프다’로 실려 있는데 표준어는 안쓰럽다이다. 안슬프다의 ‘안’을 부정의 의미를 갖는 ‘아니’로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슬프지 않다고 정반대의 말이 돼버린다. 안타깝다 역시 ‘안’에 답답하다의 옛말인 ‘답깝다’가 붙어서 변화된 말이라고 한다.
안과 속에 대해서는 원래 두 번 글을 쓰려 했으나 쓰다 보니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아졌다. 하편까지 한 번 더 쓰겠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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