묽게 쑨 미음을 쏟아 놓은 것 같다. 섬진강 새벽 안개. 늙은 산주름 사이로 접혀 있는 임실 땅은 두리함지박만해서, 멥쌀 두어 됫박이면 저 안개를 다 쑤고도 남으리라. 오봉산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산과 들이 미농지로 싼 것처럼 흐릿했다. 백로 몇 마리가 맑은 뜨물빛의 새벽 속에서 날아왔다 사라졌다. 섬진강 상류에서 가을 아침이란 하늘과 땅 사이에서 홀로 숨바꼭질 놀이하기 좋은 시간인 듯. 여섯 시 반, 능선을 타고 산 위로도 안개가 올라왔다. 너럭바위 위에 쪼그리고 있던 무릎을 폈다. 이 안개 속에 더 앉아 있다간, 천지간에 영영 술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안 땅 데미샘에서 난 섬진강은 정읍과 임실 사이의 다목적댐에서 한번 막혀 호수(옥정호)가 됐다가, 임실 강진면에서 다시 내를 이뤄 광양 앞바다까지 굽이굽이 흘러간다. 그 중 가장 곱다는 구간이 강진면 진뫼마을에서 요강바위로 불리는 순창 장구목까지의 물길이다. 봄과 가을, 일교차가 큰 날이면 물안개가 하염없이 피어 오른다. 지워져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밀도 있는 풍경이 되는 곳. 이젠 차게 느껴지는 아침 공기 탓인지 섬진강의 물낯이 한결 더 무구해 보였다. 그랬는데, 진뫼마을 사시는 임종호(80) 할아버지 왈.
"맑기는 뭣이 맑댜. 전엔 참말로 반딱반딱 했는디… 이젠 흥글흥글해 부리는구만."
자전거 타라고 닦아 놓은 도로에 식전부터 매연 뿜으며 차를 몰고 온 꼴이 못마땅하셨나 보다. 하늘이 끄무레해지고 있어서 깻단에 비닐을 씌우고 계셨다. 그 일을 제법 도와드리고야 마을 얘기 몇 가닥 얻어들을 수 있었다. 섬진강댐은 가뭄에 양껏 수탈을 할 수 없게 된 일제가 쌓기 시작했는데, 해방과 전쟁으로 공사는 세월 없이 미뤄졌다가 박정희 정권 때 와서야 완공됐단다. 그래서 꽤 굵던 마을 앞 강물이 시냇물이 됐고, 다슬기나 주워 먹고 사신다고. 말씀 않으시고 건너 뛴 대목에 이 마을에서 벌어진 회문산 빨치산 전투와 민간인 학살이 있을 것이다. 굳이 그걸 들춰 묻진 않았다. 근자의 얘기가 재미 있었다.
"글쎄, 이 잡것들이 언제 그것까지 훔쳐갔댜. 다시 갖다 놓긴 했지만시롱… 그 돌 때문에 이자껏 아무도 안 상하고 살았는디."
진뫼 마을은 징검다리가 매우 예쁘다. 그런데 징검돌 가운데 하나가 우뚝하게 크다. 자세히 보면 윗면에 한자로 '自律(자율)'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돌덩이가 자율이 된 내력은 이러했다. 이 돌은 본래 마을 사람들이 강물을 건너도 될지 안 될지 깊이를 가늠할 때 기준으로 삼던 것이었다. 엄마들이 빨래통 속에 아기를 담아 얹어 놓는 댓돌이기도 했고, 가을볕에 호박 오가리를 말리는 살강이기도 했다. 그런데 십여 년 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수소문 끝에 찾으니 어느 공공기관의 장식돌로 뽑혀가 있었다. '자율'은 그때 새겨진 것. 다시 찾아온 사람도, 윗눈치 안 보고 돌려준 사람도 모두 만만찮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뫼마을에서 구담마을로 이어지는 이십 리 강변은 섬진강 오백 리 물길 가운데 첫손가락으로 꼽히는 길이다. 불과 몇 해 전까지 흙길이었는데 최근 포장됐다. 지금은 섬진강 자전거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스이기도 하다. 찾아간 시간, 안개는 이미 걷혀 있었고 부지런한 자전거 라이더들의 표정이 밝았다. 계절의 바뀐 탓, 아니 덕인 듯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사진 찍으라며 묘기를 부려준다. 하지만 라이더를 위한 길이 아니라 그냥 흙길로 남겨뒀다면 어땠을까. 전엔 물에 손을 담글 수 있는 나지막한 길이었는데 이젠 그게 어렵게 됐다. 옅은 보랏빛의 가을꽃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일했다. 강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제 숨대로 흘렀다.
1998년 개봉한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봤다면, 스토리나 배우는 잊어버렸더라도, 배경이 되는 마을의 이미지는 아마 남아 있을 것이다. 이광모 감독이 일곱 달 동안 전국을 뒤져 찾아낸 마을이다. 좌우 대립과 전쟁, 가난과 죽음의 세월을 아름다운 시절로 그려야 했기에 로케이션 장소는 더없이 아름다워야 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미군 지프가 먼지를 피우던 길, 이젠 깨끗한 아스팔트 도로가 된 그 길을 따라 가면 섬진강이 크게 곡류하는 모퉁이에 구담마을이 있다. 영화를 만든 당시나 지금이나 마을은 무척 아담하다. 하지만 여기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은지, 마을회관 앞엔 널찍한 주차장까지 새로 만들었다. 그래도 마을은 더없이 조용했다.
"이거? 조선무시지. 무청이 맛있어. 지금 심으면 김장 때면 다 자라."
김옥순(68) 할머니는 서울에서 12년 전 이곳으로 귀농하셨단다. 언니의 시댁 마을이니 연고가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기 두루 애매한 동네. 여하튼 편치는 않았을 법한 이곳에 정착한 까닭을 물으니 그냥 호미를 들어 사방을 한 바퀴 빙 둘러 가리켰다. 산 좋고 물 맑지 않느냐는 뜻의 보디랭귀지. 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도시 살 때는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는데 호미질을 척척 잘도 하셨다. 마을 뒤에 산막리를 지?갈재, 그 너머 순창으로 가는 호젓한 옛길이 있었다고 들었다. 걸어가볼까 해서 물으니 할머니가 손을 저어 말린다. 인적이 끊긴 지 오래라 벌써 멧돼지길이 됐단다. 영화에서 안성댁이 미군 속옷을 빨아서 걸어놨다 몽땅 도둑 맞았던 강변도 지금은 잡풀이 우거져 발을 딛기 힘들었다.
잡풀을 헤치고 강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후회가 들었다. 이른 아침 투명하게만 보였던 물이 대낮의 햇살 아래 보니 조금은 탁한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섬진강이 '흥글흥글하다'는 진뫼마을 할아버지의 말이 괜한 타박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강물 건너 자전거길을 닦고 펜션을 짓는 중장비들이 보였다. 비무장지대 이남에서 '무구하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공간은 이제 정말 관념 속에만 남은 것일까. 어디 뇌에서 멀찍이 있는 장기가 뭉근히 아파오는 듯했다. 자전거를 몰고 마을을 찾아온 여행자들로 느티나무 아래가 소란스러워졌다. 저녁에 귀경하려던 계획을 바꿔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새벽 안개에 가린 섬진강의 모습이, 먼 장기에 생긴 통증에 약이 될 것 같았다.
[여행수첩]
●섬진강 상류를 둘러보려면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 먼저 전주(서전주IC)로 간 뒤 순창 방향 21, 27번 국도를 이용한다. 임실군 운암면에서 749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사진가들 사이에서 섬진강 안개 촬영 포인트로 인기 높은 국사봉에 닿을 수 있다. 여기서 717번 지방도를 타고 순창 방향으로 가면 천담마을에 닿는다. 진뫼마을과 구담마을은 천담마을에서 강변을 따라 각각 북쪽과 남쪽으로 가면 4㎞ 정도 가면 있다. ●섬진강 자전거길이 최근 개통했다. 섬진강 다목적댐에서 광양시 배알도수변공원까지 148㎞에 걸쳐 이어져 있다. 화장실 등 편의시설과 안전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자전거 여행자뿐 아니라 도보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다. 섬진강댐 아래 인증센터에서 안내 책자를 구매할 수 있다. 임실군 관광안내 (063)640-2341
임실=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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