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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노동의 족쇄, 다단계 고용] <3> 끝없이 팔려 다니는 파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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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노동의 족쇄, 다단계 고용] <3> 끝없이 팔려 다니는 파견직

입력
2013.09.10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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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프로그래머' 하면 복잡한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창조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전문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런데 정작 프로그래머들은 자신을 '노예' '일용직 노동자'라고 불렀다. '갑을'을 넘어 '갑을병정무기경신' 최대 8단계까지 이어지는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에 대부분 프로그래머들이 파견직으로 떠돌며 임금도 처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대형 프로그램 개발을 발주하는 정부와 대기업은 사업 전체를 외주화하고, 프로그래머 파견을 알선하며 거액의 수수료를 떼는 하도급 업체의 횡포가 이런 구조를 만들었다.

일 하는 사람, 돈 버는 사람 따로

프로그래머 박철원(가명ㆍ36)씨는 2008년 개발 시한 1년 중 3개월밖에 남지 않은 한 정부부처의 지방세 전자고지시스템 개발에 파견됐다. 박씨가 속한 하청업체는 발주업체(갑)-수주업체(을)-하청업체(병)-재하청업체(정)로 이어지는 다단계 구조에서 '병'이었다. 박씨 혼자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양의 일이었다. 3개월간 오전 8시에 출근해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주말에도 개발에만 매달려 겨우 시한을 맞췄다. 하지만 급하게 만들어진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박씨는 다시 파견돼 4개월 간 밤낮없이 수리를 했다.

반년 넘게 하루 평균 15시간, 한 달 450시간 이상 일했더니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손발이 저리고 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더니 극심한 소화장애와 아토피까지 생겼다. 병원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개발 시한 압박에 갑을 업체 직원들의 폭언까지 겹쳐 박씨는 대인기피, 공황장애까지 겪었다. 견디다 못해 2011년 하청업체를 그만 둘 땐 몸무게가 9㎏이나 빠져있었다.

이는 앉아서 '사람 장사'만 하며 배 불리는 IT인력파견업체들 때문이다. 파견업체들은 윗 단계 업체로부터 받은 개발비를 최대한 많이 남기려 최소한의 프로그래머를 최소한의 기간만 파견시킨다. 업주들은 수수료 명목으로 파견 프로그래머 보수의 10~20%를 떼어가는데, 20~30명만 파견해도 매달 수 천 만원의 수익을 올린다. 박씨는 "IT쪽 인력 파견이 돈이 된다고 하니까 일용직 노동자, 간병인 등을 파견하던 업체들까지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박씨가 있던 하청업체 사장은 15억원 규모 사업을 수주한 후 서울에서 4억원대 아파트를 한 채 구입했다. 하지만 10년 동안 일해 7,000만원을 모았던 박씨는 지난 2년 간 쉬면서 병원비와 약값, 생활비로 4,000만원을 써버렸다. 병세도 크게 호전되지 않아 계속 면역치료를 받고 있다.

일 터지면 하나같이 모르쇠 일관

프로그래머 김경주(가명ㆍ33)씨는 2011년 '병'위치의 하청업체와 9개월짜리 프리랜서 계약을 맺었지만 두 달치 월급을 못 받았다. 대기업 계열 캐피털 회사가 전산업무 시스템을 100억원에 발주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병'업체는 인건비를 아끼려 인원을 부족하게 투입했고, 개발이 지지부진하자 뒤늦게 프로그래머를 대폭 늘렸다가 인건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됐다. '병'업체는 돈이 없다며 버텼고, 김씨에게 실제로 업무를 시킨 '을'업체는 '병'과 해결하라고 했다.

'을'업체는 심지어 개발이 안 끝났다며 김씨에게 '병'업체와 계약연장을 강요했다. 김씨는 법률구조공단까지 찾아갔지만 업체가 3월 폐업해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이 업체는 IT쪽 지식이 전혀 없는 업주가 빌딩 경비업, 방역업, 청소용역업, 다단계판매업 등 30여 업종에 걸쳐 사업자 등록을 해 놓은 인력파견업체였다.

김씨는 이 업체에 오기 전에도 7년간 직원으로 일한 IT업체에서 2,000여만원의 임금이 체불돼 회사를 그만뒀던 터였다. 지난 7월부터는 다단계 하도급의 5단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다른 하청업체 프로그래머들이 이달 월급을 못 받아 김씨 역시 불안에 떨고 있다. 김씨는 "프로그래머들을 머슴처럼 부렸으면 임금은 떼먹지 말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지금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이다.

쥐어짜기-부실 개발의 악순환

IT업계 다단계 구조는 이런 식이다. 국가기관이나 삼성SDS LGCNS 등 IT 대기업이 정보시스템 개발을 발주하면 대기업 계열 IT업체들이 1차로 수주해 자회사 등에 다시 도급을 주고, 이 업체들은 개발 분야를 쪼개 다시 중소 업체에 맡긴다. 4차 하도급 이하는 대부분 인력파견업체다.

이런 다단계하도급은 건설업의 오랜 관행으로, 건설업에는 건설산업기본법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 등 다단계 하도급을 보호하는 법안이 있다. 그러나 하도급 역사가 짧은 IT업계는 이마저도 없다.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들의 용역계약서에는 '(프로그래머의) 무상 하자 보증 기간은 12개월로 한다' '연속 3일 이상 질병 등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계약의 나머지 기간을 해지할 수 있다' 등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이 수두룩하다.

파견업체들이 실제로 일하는 현장을 챙기지는 않기 때문에 근무 여건도 심각하다. IT노조와 장하나(민주당) 의원실이 지난 5월 IT산업 종사자 1,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57.3시간인데 76.4%는 초과근로수당을 받지 못했다.

하도급 맨 아래 단계의 중소 건설사가 적은 돈으로 부실공사를 해 건물 붕괴 사고가 나듯, IT업계에서의 '부실 개발'은 금융기관 고객 정보 해킹, 농협 전산망 파괴 등의 대형 사고의 원인이 된다. 나경훈 IT노조 위원장은 "외주화하는 것이 당장은 비용을 절감하는 것 같지만 완성된 프로그램의 질과 위험요소 유지 등을 감안하면 오히려 외주화에 훨씬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프로그래머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IT산업을 위해서도 발주처들이 프로그래머를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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