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블TV 설치기사의 한숨하는 일과 임금은 같은데 하청업체 바뀔 때마다계약 관계도 계속 바뀌어 기본급 여전히 신입 수준수당 더해 130만원 받는데 한달 생활비는 220만원경력 인정 못 받으니 은행 대출은 꿈도 못 꿔
지난 3일 케이블TV를 철거하러 가던 김선일(가명ㆍ30)씨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요금 납부지연으로 사용이 제한되오니 납부바랍니다." 케이블TV 설치 기사인 김씨가 입은 조끼에 적힌 회사의 이름만 보면 그의 일자리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재계 순위 40위권인 태광그룹의 계열사로 종합유선방송업계 1위를 다투는 '티브로드'다. 사회생활도 벌써 10년째다. 그런 그가 휴대폰 요금조차 제때 내지 못하는 것은 유니폼에 쓰인 것과는 전혀 다른 하청업체 직원이기 때문이다.
설치기사 8년간 6번의 고용계약
김씨는 고교 졸업 후 방위산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하고 2004년 경기 안산 반월단지의 한 복사기 부품업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루 12시간씩 주ㆍ야간으로 일하며 잔업 특근까지 했지만 그가 쥐는 돈은 월 200만원 남짓. 그를 공장에 보낸 인력파견업체가 매달 수수료를 떼고 준 돈이었다.
2005년 지인 소개로 티브로드 하청업체의 재하청업체에 케이블TV 설치기사로 들어갔다. 이 업체 사장도 기사들이 일한 몫에서 수수료를 떼갔다. 2009년 하청업체가 재하청업체를 정리하면서 김씨는 하청업체로 소속이 바뀌었다. 그런데 다음해 티브로드는 이 하청업체와 계약을 끊었고, 김씨는 하루 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새 일거리를 찾던 김씨는 포크레인 기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6개월간 일하고 월급은 딱 한번, 60만원밖에 받지 못했다. 당장 아내와 두 자녀의 생활비가 바닥났다. 케이블TV 설치기사로 5년 넘게 일했지만 새 하청업체와 근로계약을 한 건 1년이 채 안 돼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나왔던 터였다. 직장이 없어 은행 대출을 번번이 거절당했고 결국 사금융에 손을 벌렸다.
1년 만에 다시 티브로드 하청업체에 들어갔다. 그런데 하청업체는 직원이 아닌 개인사업자(특수고용직)로 일하라고 했고, 1년 뒤에는 다시 직원으로 바꾸라고 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은 없었다. 하는 일과 임금은 같은데, 서비스센터 통ㆍ폐합이나 하청업체 사장이 바뀔 때마다 기사들의 계약관계는 계속 달라졌다. 설치기사로 일하는 동안 1번 해고되고 6번 각각 다른 업체와 고용계약을 맺었다. 근속이 쌓이지 않으니 금융권 대출도 여전히 불가능하다.
사금융 이자는 월 100만원에 가까웠다. 김씨는 기본급 105만원 남짓에 각종 수당을 더해서 130만원을 고정적으로 받고, 케이블TV 고객 유치 영업 성과에 따라 매달 20만~30만원 정도를 더 받는다. 하지만 13평짜리 임대아파트의 월세와 지난해 태어난 막내까지 세 자녀의 양육비와 보험료, 식료품비 등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해도 다섯 식구 월 생활비는 220만원 가량 든다. 부모님과 친척, 처가에까지 손을 벌렸지만 빚은 늘어만 갔다. 더 이상 감당이 안 된 그는 지난해 신용회복위원회를 찾아 상환기간 연장 지원을 받았다. 그는 앞으로 20년간 2,000만원을 갚아나가야 한다.
비정규직보다 못한 하청 정규직
김씨는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다고 했다. 근로계약을 맺는 하청업체가 수시로 바뀌긴 했지만 정규직 계약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기 때문이다. "왜 남들처럼 10년 정도 일해 저축이 늘지는 않고 빚만 늘었느냐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답했다. "글쎄요, 내가 운이 없어서 그런가…."
김씨가 운이 나빴다기엔 동료들 사정이 너무 비슷하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기며 밤 9시까지, 주말도 없이 일하지만 기본급은 130만원 안팎. 경력인정이 안 돼 10년차 기사와 신입 기사의 기본급이 같다. 여기에 해지 고객이 케이블 장치를 반납하지 않는 것도 기사의 월급에서 삭감, 지난 5월 티브로드 하청업체의 한 기사가 월급으로 15만9,820원을 받아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청업체가 수시로 바뀌는 고용불안 탓에 금융권 대출은 언감생심, 사금융 대출을 이용하는 기사들이 적지 않다. 케이블TV 설치 철거 AS 업무 외에도 고객 유치 영업까지 해야 하고, 영업실적 압박 때문에 보지도 않을 케이블TV를 자기 명의로 가입하는 경우도 흔하다. 높은 데서 일하다 다쳐도 산재 처리는 못 받을 때가 많다. 산업노동정책연구소가 지난 3월 종합유선방송 협력업체 노동자 144명을 조사한 결과 한달 평균 쉬는 날은 2.5일에 불과한데 절반(48.6%)은 급여가 200만원 미만이었다.
이렇게 열악한 처우의 근본적인 원인은 뭘까. 민주당 을지로('을'을 지키는 길)위원회는 최근 티브로드의 내부 문건을 공개, 원청인 티브로드가 하청업체(서비스센터) 사장을 배치하고 임금 책정, 인사ㆍ노무 관리까지 했다며 불법파견 의혹을 제기했다. 하청업체 사장이 임금 인사 등 권한을 가져야 합법적인 도급이다.
의혹과 기사들의 뼈?종합하면, 원청이 하청업체를 계열사처럼 쥐락펴락하면서 하청업체 사장을 바꾸거나 센터 통ㆍ폐합을 일삼았고, 도급계약금도 갈수록 줄였다. 이 때문에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고용불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것이다.
1,000여명의 티브로드 기사들이 원청에 직접 고용됐다면 그들의 근로조건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 것이다. 김씨는 최근 이런 의혹들을 접하며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됐다고 했다.
통닭 시켜먹을 정도만 되면 좋겠다
김씨는 며칠 새 더 불안해졌다. 3월 결성된 티브로드 비정규직 노조가 하청업체들과 임금인상 등을 놓고 벌인 교섭이 결렬돼 4일부터 파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난생 처음 가입한 노조이고 처음 경험하는 파업이다. 티브로드는 대체인력을 투입한 상태다. 김씨는 "파업했다고 잘리기라도 하면 당장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많이 불안하다. 하지만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이 좀 올라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남들처럼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은 못 가도 애들이랑 통닭 시켜먹을 정도는 됐으면 좋겠어요. 애들 장난감 사달라는 거 사주고…. 재산은 못 남겨줘도 빚은 남겨주기 싫어요."
안산=남보라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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