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별개 작품으로 언급하는 해프닝이 심지어 언론 보도에서도 발생한 적이 있다. 하루키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이 번역, 소개된 전 세계 36개 이상의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나라만 라는 번안 제목을 달고 있었던 탓이다. 한국인들을 사로잡은 이 절묘한 제목을 그러나 하루키는 좋아하지 않았다.
'상실의 시대'를 소거하고 싶어했던 하루키의 오랜 바람대로 원제를 그대로 살린 이 새로운 번역본으로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세계문학전집 310번의 타이틀을 달고서다. 셰익스피어, 괴테,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피츠제럴드 등으로 이어지는 전집의 목록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 하지만 지난해 있었던 의 판권 입찰에 수많은 출판사가 몰려 이미 150만부나 팔린 이 작품을 놓고 치열하게 경합했던 것을 보면 혹은 이 '청춘문학의 고전'으로 이미 확고하게 자리잡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입찰에 참여했다 떨어진 한 출판사 관계자는 "은 세계문학전집을 내는 모든 출판사가 자사의 전집 목록에 꼭 넣고 싶어하는 타이틀"이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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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가 하루키와 정식 판권 계약을 맺고 을 출간했지만, 문학사상사가 한국에 도입한 도 그대로 서점가에서 판매된다. 우리나라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지적재산권협정에 가입하기 이전인 1989년 출간된 책이기 때문이다. 95년 이전 우리나라에는 저작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 모든 번역 출판물이 저자와의 계약 없이 임의대로 이뤄졌고, 인세도 지급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다.
하루키의 도 당시 여러 출판사에서 '마음껏' 출간됐다. 하루키도 한국이 지적재산권협정에 가입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출판사에 인세를 요구할 수 없었다. 95년 12월 개정된 국내 저작권법은 이 같은 현실을 고려, 96년 7월 1일 이전에 출간된 출판물은 개정판을 내지 않고 이전 판본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저작권법을 소급 적용하지 않고 계속 출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이른바 회복 저작물이다.
하루키는 그동안 문학사상사에 원제대로 책을 새로 내줄 것을 요구해 왔지만, 문학사상사는 이를 거부했다. '상실의 시대'가 "회사가 문을 닫는 순간까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문학사상사 관계자는 "당시에도 원제대로 나온 20여권의 책들이 있었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고, 만 베스트셀러가 됐다"면서 " '상실의 시대'야말로 한국에서 오늘날의 하루키를 만든 제목"이라고 강조했다. 문학사상사는 우리나라가 저작권협정에 가입한 이후 하루키에게 판매 부수에 따른 인세만 지급하고 있다.
번역, 어떻게 달라졌나
정식 판권 계약을 맺고 처음 선보이는 민음사의 은 가볍고 경쾌한 번역이 특징이다. 유유정씨가 번역한 문학사상사판에서 동년배의 연인끼리 남자는 여자에게 반말을, 여자는 남자에게 높임말을 했던 것과 달리, 양억관씨의 은 비교적 격의 없는 말투를 사용하고 있다. 일본어 직역체를 지양하고 요즘 20대들이 사용할 만한 가벼운 구어체를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학사상사판이 소설의 각 장마다 임의로 붙였던 소제목들을 삭제하고 원본대로 숫자만 매긴 것도 달라진 점이다.
하지만 이미 150만부나 팔린 책으로 장사를 할 수 있을까. 민음사 측은 이 작품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지 벌써 25년이나 된 만큼 새로운 젊은 독자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세계문학전집으로는 처음으로 예약 판매를 실시해 2만부가 나갔고, 초판만 5만부를 찍었다. 5만부는 통상 세계문학전집 한 권이 한 해 동안 팔리는 부수다.
하루키의 열혈팬인 회사원 고지훈(40)씨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과 결별한다는 것에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면서도 "민음사의 이 하루키가 인정한 유일한 원본이라니 컬렉션 한다는 의미에서 한 권 구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하루키에 대한 호오와 관계 없이, 기념비적인 작가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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