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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9월 6일] '종이화폐' 크기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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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9월 6일] '종이화폐' 크기의 창

입력
2013.09.05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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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있으면 많이 감탄해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각별한 형제애로도 잘 알려진 화가 고흐가 1874년 1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글 중 일부다. 오베르 쉬르오아즈 공원묘지의 고흐와 테오 무덤 앞에서 이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편지글을 처음 본 것은 몇 해 전, 낙산 근처 혜화동에 있는 한 선배 시인의 집에서였다. 갓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시인 집에 여럿이 모여 술과 음악과 이야기로 밤을 지새우는 중이었다. 방 어디에선가 손에 잡히는 책을 무심코 펼쳤다가 밑줄이 그어진 이 문장을 읽은 것이다. 그때 마음에도 밑줄을 그었다. 언젠가 고흐와 테오가 나란히 묻혀있다는 오베르의 그들 무덤에 가보리라, 하고.

그날 대화의 주제가 여행이었던 때문인지 돌연한 바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때 시인 선배가, 표지가 헤진 자신의 여권 틈새에서 반으로 접힌 50유로를 꺼내 건네주었다. 자, 이거면 오베르의 소박한 음식점에서 와인 한 병은 마실 수 있을 거야. 여행을 하고 남겨온 돈인 듯했다.

그리고는 모두 함께 옥상에 올라가 별을 보았던가. 새벽 세시와 네 시 사이가 도심의 불빛이 가장 잦아지는 시간이고, 그 시간대에는 도심 하늘에서도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오랜만에 눈에 별을 담고, 잘 접힌 50유로를 주머니에 담아 돌아왔다.

결국 작년 이맘 때 파리에 갔다. 아니, 오베르에 간 것이다. 파리에서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면 가닿는 오베르 쉬르오아즈는, 고흐가 '오베르의 교회',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을 그린 곳이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그림 속 실재 풍경들을 지나 도착한 오베르의 묘지에는 별다른 표지도 없이 야트막한 돌담 아래 똑 닮은 작은 묘비가 나란했다. 고흐가 죽고 난 이듬해 생을 마감한 테오의 사인 가운데 하나가 '과도한 슬픔'이었다. 이들 형제는 죽어서도 이리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처음에는 각자 따로 조성되었을 두 묘는 아이비넝쿨의 줄기와 잎들이 씨줄날줄 엮인 채 무덤을 뒤덮어 푸르게 하나였다.

와인 한 병을 따서 잔에 담아 묘비 앞에 두고 나머지를 동행한 이들과 나누어 마셨다. 와인의 더운 기운 때문이었는지 누군가 책을 꺼내 고흐가 테오에게 쓴 편지 몇 편을 읽어주었을 때는 살짝 눈가에 물기가 번지기도 했다. 마치 '액자소설'처럼 여정 안에서 다시 한 번 낯선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었다.

그날의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물론 선배 시인이 준 50유로였다. 50유로를 방 서까래 아래, 내 앉은 자리에서만 눈에 잘 띄는 나무 들보에 압정으로 붙여두었었다. 눈 밝은 이 몇몇이 옛날 화폐인 줄 알았는데 웬 유로화냐고 물어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무슨 비밀인양 빙긋이 웃는 것으로 답을 했다. 프랑스로 출국 전날 들보에서 50유로를 떼어 지갑에 넣으면서, 작은 소망들이 일상에서 이루어질 때의 소소한 기쁨을 맛보았다. 오베르의 묘지에서 고흐와 테오에게 건넨, 동행들과 나누어 마신 와인은 그 50유로를 온전히 들여 산 와인이었다.

오베르 여행에서 돌아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50유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시를 쓸 수는 없어도 시인의 마음을 흉내 낼 수는 있는 것이다.

한창 돌봐야 할 아이 둘을 둔 전업주부 친구는 입버릇처럼 언젠가 꼭 인도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오래 전 인도에서 남겨 와서는 책상 서랍에 넣어만 두었던 루피 뭉치를 건네주었다. 또 몇 년 치 휴가를 쓰지 않는 대신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허락해달라는 조건으로 편집회사에 입사한 후 올 여름에도 휴가를 쓰지 않은 후배에게는 유로화 한 장을 건넸다. 지난 번 여행에서 부러 환전하지 않고 여권 사이에 넣어둔 돈이다.

후배와 친구도 일상의 구석 어딘가에, 혹은 천정 가까운 곳에 종이화폐들을 꽂아두었을까. 밀폐된 일상을 환기시켜주는 그 화폐 크기의 작은 창을.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오히려 더 큰 풍경을 마음 안에 들여놓아주는 그 창을.

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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