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고속도로에서 숨진 계명대 1학년 정은희(당시 18세)양은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탈출하던 중 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이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한 이 사건은 유족들의 고소로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DNA 대조를 통해 성폭행범을 검거함에 따라 유족과 정양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것으로 보인다.
대구지검 형사1부(부장검사 이형택)는 4일 학교 축제에서 술을 마시고 귀가 중인 여대생을 집단성폭행한 혐의(특수강도강간)로 스리랑카인 K(46)씨를 구속기소하고 스리랑카로 출국한 공범 2명을 같은 혐의로 기소중지했다. 범행 당시 특수강도강간은 공소시효가 15년으로 2013년10월16일로 만료되지만, 2010년 관련법 개정으로 DNA가 확보된 성범죄는 10년 연장돼 25년이다.
검찰에 따르면 K씨 등은 1998년 10월17일 대구 달서구에서 귀가 중이던 정모(당시 18세ㆍ계명대 1년)양을 자전거에 태워 구마고속도로 아래 굴다리 근처에서 현금과 학생증을 강탈하고 차례로 성폭행했다.
정양은 사건 당시 전날 밤 축제가 열린 학교 주막촌에서 동아리 친구 등과 술을 마신 뒤 만취한 같은 동아리 회원을 바래다 주기 위해 자리를 떴다가 오후 10시40분 행방불명됐다. 이어 다음날 오전 5시 10분쯤 대구 달서구 본리동 구마고속도로 하행선에서 겉옷만 걸친 채 덤프트럭에 치어 숨졌다. 검찰은 K씨 등으로부터 집단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고속도로변을 걷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원히 묻힐 것만 같던 K씨 일당의 범행은 뒤늦게 재수사에 착수한 검찰이 교통사고 현장 인근에서 발견된 정양의 속옷에서 채취한 DNA가 K씨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드러났다. K씨는 2010년 청소년 성매수를 권유하다 적발돼 이듬해 10월 벌금 100만원형을 선고 받았고, 검찰은 이때 채취한 K씨의 DNA와 지난해 국과수의 DNA를 상호점검하는 과정에서 확인했다.
검찰조사결과 K씨는 사건 당시 산업연수생이던 공범들이 귀국한 것과 달리 한국인 여성과 결혼, 한국에서 개인사업을 해 온 사실도 밝혀졌다. 또 지난달에는 20대 여성을 자신의 가게로 불러 “가게를 내 주겠다”며 환심을 산 뒤 모텔로 유인해 성추행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한 때 용의자로 지목됐던 트럭 운전사와 같은 동아리 회원도 혐의를 완전 벗을 수 있게 됐다.
이금로 대구지검 1차장 검사는 “영구미제로 묻힐뻔한 이 사건은 부장 및 주임검사가 3개월 여 동안 여러 차례 현장을 답사하는 등의 수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나라와 스리랑카는 형사사법공조조약이나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지 않아 공범들의 신병확보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진상은 밝혀졌지만, 이 과정에서 경찰뿐 아니라 검찰의 소극적인 수사태도가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1년 전에 DNA 대조를 통해 K씨의 존재가 확인됐지만 교통사고 기록 등이 폐기되는 등 수사진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미적거리다가 지난 5월 유족들이 대구지검에 또다시 고소하고서야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도 사건 당시 정양은 겉옷만 걸쳤고, 사건 다음날 현장 부근에서 유족들이 정양의 속옷을 찾아왔지만 다른 사람 것이라며 애써 무시했다. 이는 경북대법의학교실의 부검 결과 정액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것도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국과수가 정양 속옷에서 범인의 DNA를 검출해 낸 것도 유족들의 끈질긴 탄원 끝에서야 이뤄졌다. 경찰이 발견하지 못한 속옷을 유족과 정양의 학교 친구들이 찾지 못했다면 정말로 영구미제가 될 뻔했다.
정양의 아버지 정현조(67)씨는 “뒤늦게나마 범인이 밝혀져 다행”이라며 “초동 수사를 철저히 했더라면 더 빨리 밝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정광진기자 kjche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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