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에 가거들랑 닭갈비를 먹어보거라. 전부터 J가 그랬다. 자칭 ‘개스트로노미(미식) 투어의 1인자’인 J의 고상한 인상과 탄광도시 태백의 이미지와 춘천이 일찌감치 브랜드를 점유한 닭갈비라는 아이템은 좀체 서로 어울리지 못해서, 생게망게하게 여기고 있다가 태백을 지나는 길에 문득 떠올라 드디어 먹어 봤다. 탁! 아… 그래, 이 맛이여. 한번 먹어봐야 한다. 이 기사는 4D 플렉스로 서비스될 턱이 없으니, 맛이 어떻고 하는 어설픈 묘사는 일절 생략하기로 한다. 한번, 먹어봐야 한다.
J로부터 들은 태백 닭갈비의 유래는 대강 이러하다. 얼굴에 탄가루만 묻어 있으면 누구나 산업전사 대접을 받던 시절, 수천m 지하 갱도에서 종일 곡괭이를 휘두르다 나온 전사는 무진장 배가 고팠는데, 그렇게 전사의 주린 배와 천근만근 무거운 몸뚱이를 뜨끈하게 데워주기 위해 태어난 음식이 바로 이 닭갈비다. 영양도 충분한데다 무엇보다 값이 싸서 사랑 받았단다. 납득이 간다. 확인할 겸 좀 더 캐묻고 다녔다. 그런데, 진짜 태백 닭갈비의 역사는 조금 다른 듯했다.
“처음엔 이 거리에 광부들은 못 들어왔어요. 값도 비쌌고 높은 사람들이 주로 다니던 곳이거든. 닭갈비? 그건 우리 같은 예술인들이 먹던 거지.”
김부래(72) 선생은 태백의 자연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 백두대간의 나무와 풀에 환하다. 하지만 그는 왕년의 색소포니스트. 방송국 악단 출신으로 1960년대 광산 경기가 타오르며 태백의 밤거리도 서서히 달아오를 때 이곳에 정착했다. 그에 따르면 물을 부어 끓여먹는 독특한 태백식 닭갈비는 60년대 말의 어느 겨울날, 지금 황지동 국민은행 태백지점 맞은편에 있던 조그만 포장마차에서 시작됐다. ‘오브리 밴드’의 세면맨들, 대폿집의 ‘바우(웨이터)’들, 대구관 서울장 은호정 해운정 같은 간판을 내건 요정의 기생들이 그 포장마차의 단골이었다.
“밤새도록 울고넘는 박달재, 두만강 푸른 물에 같은 거 ‘오브리’ 하고 나면 얼마나 지쳤겠어요. 술 따른 기생 애들도 그렇고. 집에 가기 전에 한 잔 안 할 수 없지. 포장마차에서 우리끼리 만나면, 그땐 진짜 음악도 연주해 보는 거에요. 존 콜트레인도 하고 루이 암스트롱도 하고…”
“그러다 취하면요?”
“그러면 우리도 요정집에 가서 오브리 불러 놓고 질펀하게 노는 거야. 목포의 눈물, 두만강 푸른 물에, 하하하.”
태백의 닭갈비는 본래 쇠고기 너비아니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닭고기를 넓적하게 저며서 양념에 재운 뒤 석쇠에 구워먹었다. 그런데 강릉 출신이었다는 황지동 그 포장마차 주인이, 솥뚜껑을 엎어놓고 고기에 물을 붓는 모험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 얼큰하고 칼칼하고 뭔가 텁텁한 듯하면서도 강원도 산나물의 향긋함이 살짝 얹혀 경쾌함이 죽지 않은 맛이 탄생했다. 말하자면 재즈의 ‘그루브’가 그 맛엔 살아 있었다. 그리하여 황지동 여관골목의 예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술안주로서 태백식 닭갈비가 태어났다. 지금도 태백 닭갈비의 국물에 우동 사리를 넣어 먹는 건 이 메뉴가 포장마차의 자식이라는 증거.
태백 닭갈비는 80년대 석탄 산업의 절정기에 광부들과, 그 가족들 사이에서도 퍼져 나갔다. 시내에 남아 있는 닭갈비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송이닭갈비의 주순옥 대표와 태백시청 이정우 계장에 따르면, 황지동에 버스터미널이 있던 그 시절 먹자골목엔 한 집 건너 한 집이 닭갈비집이었다. 밤무대 사람들의 술안주에서 가족 회식 메뉴로 변했지만 조리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파는 방식이 변했다. 쇠고기 갈비처럼 한 대에 얼마 하던 식에서 1인분에 얼마 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고춧가루를 조금 빼고 냉이 미나리 같은 채소의 양을 늘린 것, 그리고 떡과 라면 사리를 넣은 건 닭갈비가 바깥으로 알려지고 난 뒤 최근의 변화다.
“아유, 왜 안 힘들어요? 우리도 문 닫을 생각 여러 번 했지. 그땐 지금처럼 서울에서도 이걸 먹으려고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지요.”
80년대 말 전격 실시된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은 광부뿐 아니라, 주 대표처럼 광부의 월급봉투에 기대 살던 사람들에게 직격탄이었다. 12만명이던 태백의 인구는 5만명까지 쪼그라들었다. 설상가상 시청이 상장동으로 옮겨가면서 황지동 먹자골목은 나날이 퇴락해 갔다. 90년대 중반 황지동 닭갈비집은 서너 개만 남고 모두 폐업했다. 남은 집도 메뉴판에 닭갈비 말고 다른 걸 써 놓아야 했다. 인심이 변하면 입맛도 변해버리고 마는 걸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단다. 어떻게든 이걸 먹어야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주 대표는 회고했다. 인천으로 시집간 뒤 애를 갖고 수년 만에 “미치도록 먹고 싶어” 찾아온 임신부도 있었단다. 그래서 태백 닭갈비의 맥은 끊기지 않았다.
양배추와 양파를 많이 넣고 볶아 단맛이 나는 꼬들꼬들한 춘천식 닭갈비와 얼큰하게 끓여 먹는 태백식 닭갈비 사이에는, 단순히 건식과 습식으로 구분할 수 없는 틈이 있다. 그 틈은 맛의 차이이기도 하고 흥의 깊이이기도 하고 어쩌면 애잔함의 농도이기도 할 것이다. 60년대 오브리 밴드의 기억이, 80년대 광부들의 노동이 그 속에 녹아 있다. 이제 주말이면 관광버스가 좁은 황지동 골목길 앞에 줄을 서고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의 관광객을 부려놓는다. 굳이 시시콜콜한 내력은 몰라도 좋다. 소주 한 잔이면 족하다. 칼칼한 닭갈비 국물이 당신 목구멍을 넘어가면, 왜 이런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는지 절로 알게 될 것이다.
태백=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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