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인은 자동차에서 내려 저녁 시골길을 걷고 있다.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뒤돌아보며 떠올린다.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는 이야기를."('되돌아보는 저녁') 영혼을 놓쳐버린 정신적 미아들로 가득한 "이 서정 없는 문명"('풀잎 우표')의 세계에서 잠시 서서 뒤돌아보는 것. 이것이 미친 속도의 시대, 시인에게 부여된 소명이다.
공광규(53)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를 펴냈다. 1986년 등단한 이래 자본주의적 모순에 가열찬 비판을 멈추지 않았던 이 시인은 이번 새 시집에서 바야흐로 그윽하고 단아한 서정의 시편들을 선보인다.
흰 눈이 수백만 평 평야를 덮어 만든 원고지에 "너라는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름다운 문장"을 쓰려다 말고('너라는 문장'), "물결무늬 등고선은 당신이라는 사막을 향해 불어간 슬픔의 지도입니다/ 당신을 향해 불어간 마음의 지문입니다"라고 고백한다.('사막이 우는 밤) 갈대도 대나무도 해금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들은 다 속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속 빈 놈이 되어야겠다"고 결심도 한다.('속 빈 것들')
비운다는 것은 이 시인이 구축한 서정의 세계에 핵심적 원리다. "공시가격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에 살면서 "큰 고을 영주가 되는" 방법이 있다. 시집의 표제처럼 담장을 허무는 것이다. 오래된 담장을 허물고 나서 이 집 마당으로 들어온 것의 목록은 말 그대로 우주적이다.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까지…, 시인은 이 모든 것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담장을 허물다')
"시는 사는 만큼 쓴다. 내가 참 보잘것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시인의 말은 당연히 겸손이다. 사는 만큼 씌어진 이 정직한 시들은 기어코 아름답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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