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활자가 둥둥… 중력을 버리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활자가 둥둥… 중력을 버리다

입력
2013.08.30 11:39
0 0

철사로 모형 만들어 모빌… '효율적인 읽기'라는 태생의 짐 벗어 던져구글이 만들어 낸 '자동 완성기능' 통한 시로 번역서 오역 모아 소설로새로운 문학 탄생시켜타이포그래피·텍스트 입체적·능동적 관계 표현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눈동자는 나열된 단어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한 위치에 머물렀다가 다음 위치로 재빨리 이동하는, 이른바 '단속성 운동'을 하는데 이는 우리가 글을 음절 단위가 아닌 몇 개의 단어 묶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초기의 인쇄업자(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술을 발명한 15세기 중반 이후)들은 당연히 이런 점들을 고려해 활자를 배열했고, 이후 '효율적인 읽기'를 위한 배열의 기술은 차곡차곡 쌓여갔다. 최초의 인쇄 매뉴얼 중 하나인 조셉 목슨의 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훌륭한 타이포그래피는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독자'에게 똑똑하게 전달하여 저자의 작품이 독자의 눈에 품위 있어 보이도록 해, 읽기가 즐거워지도록 해야 한다…들여쓰기, 구두점, 이탤릭체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저자의 재능을 살리고 독자의 이해도 향상시킬 수 있다"

저자와 독자의 매개자를 자처하는 초기 타이포그래퍼의 우직한 가르침은 50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산산이 부서졌다. 30일 문화역서울284에서 개막한 '타이포 잔치 2013: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서는 '효율적 읽기'라는 태생의 짐을 벗어버린 활자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전시 총감독을 맡은 최성민 서울시립대 교수는 "현대 타이포그래피는 주어진 글을 수동적으로 꾸미는 역할을 넘어 (책의) 저자 역할을 일부 담당하고 있다"는 과격한 말로 전시를 시작했다. 문학의 영역까지 넘보는 듯한 이 표현은, 전시된 작품에서 그 뜻을 일부 드러내 보인다.

항의하고 날아오르고 번식하는 글자들

전시장 한 켠에 우리가 잘 아는 J.D.샐린저의 소설 이 놓여 있다. 무심코 읽어 내려간 책은 깜짝 놀랄 만큼 오역투성이다. 전용완 디자이너는 1969년부터 2002년까지 국내 출판된 번역서 12종을 수집, 1951년 영어 초판과 꼼꼼히 비교해가며 오역되거나 어색하게 번역된 문장들을 골라 한 편의 소설로 완성했다. 한 문장을 모든 책이 잘못 번역했다면 그 중에서 최악의 문장을 엄선했다. 이 작업이 오역을 일삼는 국내 출판사들에 대한 항의인지, 흠 있는 것을 좋아하는 디자이너의 짓궂은 취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문장 배열에 디자이너의 취향과 해석이 개입할 때 창작 없이도 완전히 새로운 텍스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일본 디자이너 오하라 다이지로는 철사로 만든 문자 모형을 실에 매달아 공중에 띄웠다. 읽히기를 거부하듯 빙글빙글 도는 문자 모빌은 어느 순간 배경에 쓰인 획들과 결합해 해독 가능한 문자가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시 기우뚱거리며 문자를 해체한 모빌은 얼마 안가 돌아와 또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다. 디자이너는 책에 고정돼 있던 글자를 공중에 띄운 뒤 관객과 함께 그 움직임을 살핀다. 책의 중력을 벗어난 활자가 유영하며 만들어내는 문자 풍경은 종이 위에서만 이루어졌던 전통적 타이포그래피 개념을 해체한다.

인터넷과 디지털의 발달이 가져온 변화도 놓칠 수 없다. 저술가 겸 영상 제작자 삼프사 누오티오와 라이사 오마헤이모는 2012년 10월부터 '구글 시(google poetics)'를 수집해 왔다. 구글 검색창에 단어를 써넣으면 뒷부분을 알아서 완성해주는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을 통해 우연히 만들어진 시다. 검색창에 '언제(when will)'라고 쓰면 구글은 '언제 지구가 멸망할 것인가' '언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언제 죽게 될까'란 문장을 완성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입력한 검색어를 바탕으로 하므로 문장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구글이라는 초거대 IT기업의 기술이 낳은 이 자가생식적 작문은, 문자 몇 개를 배열하는 행위만으로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시대임을 상기시킨다.

타이포그래피, 스스로 텍스트가 되다

작품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가지 예민하고 도발적인 질문으로 수렴된다. '타이포그래피는 텍스트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작가는 텍스트의 성격을 규정하는 온건한 방식으로, 다른 이는 텍스트를 해체하는 과격한 방식으로 답한다. 전시 큐레이터인 타이포그래피 저술가 겸 디자이너 유지원 씨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타이포그래피와 텍스트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입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설정되어 왔는가에 대한 탐구"다.

탐구의 과정은 때로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문학 창작과 활자 배열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라고 여겨온 사람들은 문학으로서의 성격을 흡수하는 듯한 타이포그래피의 시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러나 타이포그래피의 문학적 잠재성은 이미 문학에서 활용되고 있다. 시인 이상은 전통적 문자 배열을 깨뜨린 시각시로 새로운 문학을 탄생시켰다. 내용의 속박을 벗어나 낱말을 반복하고 배치한 이상은, 그 순간 시인이기도 하고 타이포그래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반대로 타이포그래퍼가 문자를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해 시라고 주장한다면 어떨까?

이 당혹스런 질문은 전시를 보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진다. 문학으로서 타이포그래피의 잠재성을 인정하자니 전통적 사고가 발목을 잡고, 부인하자니 이상의 시를 넘어 다다이즘까지 부정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다. 참여 작가들은 관객의 고뇌는 아랑곳 않고 문자의 배열이 텍스트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을 때까지 실험을 밀어 붙인다.

"정답은 없어요. 시험 보듯이 전시를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성민 총감독은 "작가가 작품을 해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며 웃었다. 그의 말을 힌트 삼아 타이포그래피와 텍스트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 받는지 관찰하는 것이 전시를 즐기는 비결이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타이포 비엔날레는 지난 2011년 행사에 비해 규모와 기간이 확대되고 신작이 늘어나는 등 내실을 다진 모습이다. 지난 번 전시가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중∙일 문자 문화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아시아는 물론 유럽과 미국의 대표 작가 58명(팀)이 참여해 내용면에서도 풍성해졌다.

전시 기간 동안 인근 서울스퀘어 미디어캔버스에는 시인 7명과 디자이너 7명이 짝을 이뤄 만든 영상 시가 전시된다. 행사는 10월 11일까지 이어진다. 자세한 일정이나 전시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www.typojanchi.org

◆타이포그래피란?

이미 만들어진 글자와 서체를 책과 문서, 디지털 매체에서 읽기 좋게 기술적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나 그 과정을 말한다. 컴퓨터에서 쓰이는 글자꼴을 만드는 폰트 디자인이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인 캘리그래피와는 다른 개념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