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수 경기지사가 무상급식을 위한 경기도 예산을 전액 삭감함으로써 다시 무상급식이 문제로 떠오르는 모양이다. 세금을 걷어 마련하는 예산이라는 게, 주민들의 좀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일진대, 대체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쓰는 돈에 대체 왜 이리 시비와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2011년 무상급식 논란 때 무엇이 문제였던가. 가난해서 급식비를 낼 수 없는 아이들만 선별하여 급식을 제공하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자원을 주는 것이니. 그러나 알다시피 실제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런 급식을 가난한 아이들이 먹지 않고 거부 한다는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이들의 자존심이, 다른 친구들 앞에서 자기 집의 가난, 자기 부모의 무능력함을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밥을 굶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맘 편히 급식을 받아먹을 수 있게 하려면, 모든 아이들에게 무료로 급식을 주어야 한다는 게 무상급식을 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 생각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아니, 배고픈 이들이 밥 먹여주면 고맙게 여길 일이지, 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거야?' 당신이 급식을 받아먹어야 할 처지라면, 한 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자신의 빈곤을, 즉 자신의 무능력을 남들 앞에 드러내고 인정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정말 아사의 문턱에 내몰리지 않고선 누구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상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금의 복지제도는 근본적으로 이와 동일한 잘못된 발상 위에 서 있다. 가령 지금 기초생활수급금을 받기 위해선 정부가 정한 빈곤선 아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빈곤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임을 입증해야 하고, 자신의 가족 또한 자기를 도울 능력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가족부양의무제 때문에). 그것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더 이상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살아갈 어떤 능력도 없음을, 자신을 도와줄 어떤 사회적 관계도 없음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가혹하고 무참한 모욕인가. 이런 조건에서 복지혜택이란 자기 자신의 무능을 증명함으로써 받는 모욕적인 구걸이 된다. 무능력의 증명을 통해 자신이 확실한 '거지'임을 입증할 수 있는 이를 선별하여, 그런 모욕을 대가로 얻은 생계비를 '동냥'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 '선별'을 전제로 하는 복지제도의 요체다.
복지(福祉)에서 복(福)은 제사지내고 나누어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즉 공동체를 이루는 성원이 함께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를 뜻한다. 지(祉)는 하늘에서 내리는 행복을 의미한다. 복지란 음식을 함께 나누며 누리는 지복을 뜻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동체에서 없는 이들과 음식을 나누는 건 아주 기본적인 덕이자 의무였다. 복지는 생계를 유지하는 경제적인 비용 이전에 먹을 게 부족하면 나누어먹을 수 있는 사회적 관계를 제공하는 것이고, 그런 관계 속에서 서로 간의 신뢰와 애정,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자긍심을 제공하는 것이다. 경제적 복지 이상으로 사회적 복지가, 그 이상으로 정신적 복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생활능력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이를 선별하여 먹을 것(생계비)을 제공하는 저 모욕적인 제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약간의 생계비를 제공하는 것으로 다른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욕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복지가 아니다. 무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이를 선별하여 제공하는 복지는 이런 끔찍한 역전을 면할 수 없다. 그런 선별과 증명이 필요없는 보편화된 복지, 이 땅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생존을 보장해주는 그런 복지가 아니라면 정녕 '복지'라고 말할 수 없다고 믿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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