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혁4인방 재판(1981) 이후 최대 정치사건인 보시라이 재판이 막을 내렸지만 후폭풍이 거세다. 탐욕, 부패, 직권남용, 부정축재, 성상납, 외도, 배신, 살인으로 얼룩진 그의 막장드라마는 당 관료사회의 썩어 문드러진 폐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재판에서 보인 그의 카리스마와 소신을 굽히지 않는 당당함은 '정치쇼'를 보듯 상당수 국민들을 매료시켰고, 좌파세력을 결집시키는 역풍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 그의 몰락은 중국 정치권의 좌우 노선투쟁이 격화한 2012년 18차 공산당대회를 앞두고 예견된 일이었다. '법치로 부정부패 척결'을 공개재판을 통해 보여주겠다는 당의 정치적 의도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너무 튄 것이 문제였다. 공산당'8대 원로' 아들이자 화려한 경력으로 시진핑과 함께 태자당 대표 정치인인 그는 빈부갈등이 깊은 중국경제에서 새로운 '충칭 모델'을 주도하여 좌파세력의 총아가 됐다. 평등과 복지 확대, 민생 우선, 혁명 찬양을 앞세워 마오의 평균주의 실현에 광분했다. 시진핑 체제에서 정적으로 돌변할 수 있는 좌파를 정리하고 권력기반을 다지기엔 부패에 연루된 그야 말로 희생양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 그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지한파로 꼽힐 정도다. 5년간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한 그는 중국 서부대개발의 창구인 충칭에 한국기업들의 투자유치에 열정을 쏟았다. 당시 한국타이어, SK종합화학, 금호석유화학, 포스코 등이 충칭에 투자했다. 2006년 그가 상무장관 재임 시절부터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당시 경기도지사) 등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고 박태준 포철회장, 이한동 전 국무총리와도 교분을 쌓았다.
▲ 역설적이지만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 선고가 예상되는 그가 이번 재판의 최대 승자라는 시각도 비등하다. 재판에서 보인 그의 저항은 지지파인 좌파세력을 자극하며 결집력을 높였다. 오히려 좌우 노선갈등을 심화시켜 새로운 권력투쟁의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벌써 보시라이의 재기 가능성에 대해 우려와 기대감이 교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학만 논설위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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