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역사학자 이희진(50)씨는 역사학계의 괴짜다. 전작 는 한국 고대사학이 일제 식민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통렬히 비판해 학계에 논란을 일으켰다.
스스로 '비주류'라고 칭하며 학계를 불편하게 만들어온 그가 이번에는 일국사 중심의 역사 서술 관행에 반기를 들었다. 최근 출간된 은 한국, 중국, 일본의 고대사를 엮어 동아시아 전체 고대사의 흐름을 짚은 개설서다. 예를 들면 고조선이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사실은 한국사에 특수한 것이 아니라 중국 상나라와 공통된다. 지배층이 신의 자손임을 자처해 피지배층의 저항을 방지하는 것은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일반적인 정치 체제였다는 것이다. 이 체제는 추후 일본에서 국가가 형성될 때도 이식돼 천황의 존재로 이어진다. 그는 "어떤 국가의 역사도 주변국과 얽히며 형성된다는 것을 조명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중국의 동북공정 등 고대사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역사 전쟁은 각국이 자국 역사만 고집하고 이면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어리석은 소극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의 근거로 주나라 때 주변 지역이 주 왕실에 조공을 바쳤으므로 주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논리를 편다.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 정치 체제가 천하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세계관의 반영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책은 "주 왕실의 봉건제는 조공을 바치는 주변 지역 제후들에게 통치 권한을 위임하는 설정이었지 실질적 지배-복속 관계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이씨가 이 책을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국내 역사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는 "지금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영역을 나눠 쓰여졌는데 이는 정치에 중점을 두는 것이 피지배층을 역사에서 배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 사관의 영향"이라고 지적하며 "하지만 이런 서술 방식으로는 역사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치는 지배층의 영역이었지만 동시에 경제제도, 사회ㆍ문화 현상이 반영되는 종합예술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신념으로 그가 쓴 '종합예술' 정치사는 인간과 철학을 담고 있고, 술술 읽힌다. 그런데 이게 현행 교육 제도 내에서는 안 먹히는 이야기다. 이 박사는 "딸이 고등학생일 때 국사 과외를 해주다가 30분 만에 방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며 "딸은 당장 시험에 나올 것들을 원했는데 나는 앞뒤 맥락을 다 설명하고 있으니 답답했던 모양"이라며 웃었다. 그는 "역사 교육은 아이들에게 사회의 조직 원리와 인간 속성을 이해시키고 '내가 권력자라면 사회를 어떻게 조화시킬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는데 왕의 계보나 외우게 하는 현행 역사 교육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일갈했다.
이는 저명한 역사학자인 아버지에게 반항하느라 애초 생물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가 뒤늦게 역사에 발을 들인 이씨 자신의 삶에서 배운 교훈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성무(76) 전 국사편찬위원장이다. 이 박사는 "아버지가 한문을 강제로 외우게 하는 게 싫어서 인문학은 안 하려고 이과를 선택했는데 막상 대학 도서관에서 역사책과 문학책만 눈에 들어왔다"며 "역사가 암기 과목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 박사는 올 봄에는 아버지의 숙원이었던 한국사 통사 를 공저했다. 부자가 역사학자로서 동행하게 된 것이다.
이씨는 역사가 왜곡되고 오해되는 위기 상황에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 출간으로 부지런히 맞서고 있다. 다음달 말에는 고려의 개혁을 두고 대립했던 김부식과 묘청, 세력 다툼을 벌인 신라 선덕여왕과 백제 의자왕 등 역사 속에서 대립했던 인물들의 처세를 재평가하는 책을 출간할 예정이고, 동아시아 중세사를 다룬 는 올해 말 나온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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