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감개무량해. 여기에 오니 절로 울분이 치솟는구먼."
103주년 경술국치일을 하루 앞둔 28일 오후 서울 남산 기슭에 있는 '통감관저 터'. 이곳은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이 일본의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와 강제병합 조약을 맺은 곳이다. 이레 뒤인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면서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곳을 처음 찾았다는 김우전(91) 광복회 고문은 통감관저 터 표지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나라를 팔아먹은 곳이란 말이야. 일제 강점기 때는 국치일이 3ㆍ1절 다음 가는 큰 기념일이었어. 근데 요즘 사람들은 국치일이 언제인지, 올해가 몇 주년인지도 몰라."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경술국치일. 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입을 통해 들은 그 날은 어느 날보다 특별한, "분개하고 격정을 터뜨리는 날"이었다. 김 고문은 1944년 1월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탈출해 그 해 5월 광복군에 들어갔다. 고 장준하, 김준엽 선생 등과 함께였다. 광복군 간부 훈련반을 졸업한 후 김구 선생의 비서 역할도 했다는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선 국치일에 순국 선열들을 기리는 추념식을 열었다"며"평소에도 늘 굶주렸지만 그 날만큼은 치욕을 잊지 않으려 아예 식사를 걸렀다"고 회상했다.
임시정부나 광복군 등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국치일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평북 정주시의 오산학교에 재학하던 중 비밀결사 조직인 혈맹단으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던 승병일(87) 선생은 "국치일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지 않아도 가족, 일꾼 할 것 없이 열댓 명이 둘러앉아 더운 밥 대신 식은 죽을 먹었다"고 했다. 승씨는 "아버지께서 국치일이면 우리를 불러놓고 언젠가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 하지만 이 날의 치욕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사료에서도 국치일을 기렸던 선조들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딸이자 광복군이었던 고 지복영 여사의 회고록엔 국치일에 불렀던 '국치추념가'의 가사가 적혀있다. '경술년 추팔월 이십구일은 / 조국의 운명이 떠난 날이니 /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여라 / 갈수록 종 설움 더욱 아프다'
지 여사는 회고록에서 만주 지린(吉林)성의 검성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리며 "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부르던 그 국치의 노래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저녁에 강당에서 공연한 연극 이야기도 이어진다.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아버지를 찾아 나서는 어린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탓에 배우, 관중 할 것 없이 온통 울음바다가 돼 버렸다."
이런 선조들의 격정을 보고 자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경술국치일이 잊혀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의 아들로 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정육(78)씨는 "경술국치는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아득해졌다"면서 "대부분 학생들이 역사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활동도 생겨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아 '통감관저 터' 표지석을 세우는 데 앞장섰고, 국치일을 국가기념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또 광복회는 2011년부터 태극기 조기 게양을 독려하고 찬 죽으로 점심을 먹으며 이 날을 기리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올해부터 지방 조례를 제정, 국치일에 경기도 일대 정부기관에서 조기를 게양하도록 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은 "통한의 역사를 되새기는 것은 반성과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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