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깨달았다. 이 말을 성철 스님이 하셨다는 것만 알지 그 뜻을 찾아본 적도 없고 이 글을 쓰면서도 역시나 찾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말, 엄연하게 심장에 새겨졌다.
나는 연극을 직업으로 삼은 연출 내지 극작가다. 그것에 회의를 느껴본 적이 없다. 작가료를 떼이거나 연출료를 받지 못했을 때, 관객이 외면할 때도 그렇지 않았다. 다만 연극으로 먹고 사는 일이 만만치가 않군, 하는 정도. 그러다 10년이 넘고 15년이 넘어가면서 조금씩 다른 회의가 생겨났다. 가만 보자. 이게 어찌 되어가는 판인가.
근래 몇 년이 특히나 당황스럽다. 2001년에 쓴 '이발사 박봉구'라는 연극에서 나는 세상에서 밀려나는 직업과 그것에 대한 애정을 다룬 적이 있다. 지금은 이용사뿐만 아니다. 성냥을 자존심으로 만들고 라이터의 고급한 디자인을 연구했던 사람은 이제 많이 애매하다. 손목시계도 아이폰에 달려 있으니 덜 팔리고 탁상시계도 이젠 수집품이다. 당연히 시계수리점도 눈에 안 띈다. 사진관도 전보다 쓸쓸해졌고 탁상전화기 회사도 시장성이 고민이다. 전파상과 레코드 가게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정말이지 못 봤다. 그러는 사이 개의 팔자도 달라졌다. 주인이 개를 찾지 않고 개가 주인이 되어 사람을 찾는다. 그러더니 이제는 북한산자락에 떼로 살며 자력갱생도 불사한다.
그런 와중, 제대로 판세를 읽을 겨를도 없이 LTE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찾아볼 관심도 없는 나에게 세상은 너쯤이야 낙오되어도 상관없지 하며 초고속으로 멀어졌다. 문득 돌아보니 나는 동시대를 살면서도 전혀 동시대적 인간이 아니었다. 심지어 팔순의 아버지도 010인데!
다시 산은 산, 물은 물로.
갈피와 향방을 못 잡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 동료와 술에 취한 새벽 2시경, 문득 방언처럼 튀어나왔다. 그렇구나. 산은 산이고 물은 가차 없이 물이구나. 나는 나고 남은 남이구나, 연극은 다만 연극일 따름이구나! 오로지 본질로 회귀한 그것에 답이 있었다. 그 전에는? 나는 산이 산다워야, 연극이 연극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산은 그냥 산이다. 만일 산이, 산 비슷하다면 이미 그것은 산이 아니다. 비슷한 것은 비슷할 뿐이다. 닮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산은 원래부터 산이었고 지금도 산이며 앞으로도 산일 것이다. 그 산이 무엇인지만 알면 된다. 그 뿐이다.
자, 연극은 연극이다. 연극이 곤란해진 것은 3D영화, 드라마, DVD, 케이블TV의 수백채널, 놀이공원 때문이 아니다. 연극이 아닌 연극이 많았기 때문이다. 연극다운 연극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연극이 아닌 것이 연극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만일 산처럼 물처럼 누가 봐도 자명한 연극이 많았다면 연극은 분명 지금의 형편이랑 달랐다. 세상이 초우량한 엔진으로 내달려가도 전혀 상관없다. 어차피 연료를 채우느라 멈출 테고 그 때 그 자리에서 연극이 할 노릇을 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되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연극은 무엇인가? 또 다시 '연극은 연극이다' 라고 말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이 적합하다. 이런 명제가 말이 아니라 심장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살든, 그것을 보러 찾은 사람이든 양쪽 다 행복하게 그 순간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아, 여기서 한 말씀만 더. 산은 계절 따라 색깔을 바꾸기도 무성해지기도 앙상하게 몸뚱이만 남기기도 한다. 물은 얼기도, 풀리기도, 기분 좋으면 승천했다가 강림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변해도 산은 산, 물은 물이다. 연극도 그렇게 변화무쌍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더욱 자명해진 숙제를 고민하는 요즘이 스릴 있다. 다시 연극이 신난다.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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