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시 한복 차림에 탕건을 쓴 할아버지가 무대에 올라 고전 소설'장화홍련'을 읽어 나가자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좌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마지막 전기수(傳奇叟) 정규헌(77ㆍ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선생. 서울도서관에서 28일 열린 '우리시대의 이야기꾼 전기수를 만나다'행사에 초대됐다.
조선시대 후기 이 마을 저 마을 불려 다니며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소설을 낭독해주던 전기수는 스타였다. 정옹 역시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전기수로 충청도 곳곳을 누볐지만 TV 등 대중매체가 보급되면서 찾는 이가 줄자 그만뒀다. 그 뒤 생계를 위해 30년간 제지공장을 다녔고, 퇴직하면서 1996년부터 다시 전기수로 활동하고 있다. 정옹은 "지금이야 눈을 현혹하는 것들이 많아서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다"며 "쎄이(싸이) 말춤 추는 거나 찾아 다니는 게 애석하다"고 했다.
이날 정옹이 들려준 부분은 장화와 홍련이 부사에게 억울함을 고하고 원수를 갚아달라고 요청하는 대목. 창을 하듯 독경하듯 일정한 리듬을 타며 흔들림 없이 읽어가던 목소리가 자매의 읍소 부분에 이르자 슬쩍 톤이 올라가기도 했다. 조부모 무릎을 베고 누워 듣는 듯 구수한 이야기에 마음이 편안해진 관객들은 어느새 리듬에 맞춰 몸을 좌우로 슬쩍슬쩍 흔들고 있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갑니다' 하며 침을 스윽 묻혀서 한 장 넘기고 읽어 내려가던 중 같은 부분을 두 번 읽었다고 이실직고하고는 "젊어서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하며 겸연쩍어하자 좌중들의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정옹에 이어 만화 '스머프'의 가가멜 목소리로 유명한 성우 탁원제씨와 강화중학교 사서교사 김혜연씨도 나와 전기수의 역사와 삶을 다룬 두 권의 책 와 를 각각 낭독했다. 김 교사는 "아이들에게 독서 지도를 해보면 이해는 둘째 치고 읽기 자체가 되지 않는다"며 소리 내서 읽는 행위 자체가 교육적 효과를 지닌다고 말했다. 이어진 좌담회에서 이 두 책의 저자 정창권, 윤혜숙씨는 "낭독은 귀를 기울여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온전한 이야기를 전달받는 경험이며, 혼자 눈으로 읽는 묵독에서는 얻을 수 없는 공동체 문화와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고 낭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