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 견디지 못하는 것 중에 치기, 유치함 같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사실 나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후배들보다도 선배가 훨씬 편한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얼마나 치기 어린 시절이 있었던가. 스무 살 때는 이런 생각에 골몰했었다. 나는 매력적인 새엄마도 갖지 못했고 폭력적인 새아빠도 갖지 못했다는 불운의 나약한 뼈대에 대해서. 나는 애인의 강력한 정부와 버스터미널 뒤편 기름기 먹은 축축하고 으슥한 광장에서 각목을 들고 싸워본 적도 없다는 불운의 무료함에 대해서.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나는 권태가 일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요소라는 좀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라는 생각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당신들이 방바닥에 누워, 배를 타고 오르는 강아지의 귀를 쓰다듬는 순간조차도 맹렬하게 죽음과 맞서고 있다는 걸 안다. 중환자실의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노인뿐만 아니라, 인큐베이터 속의 갓난아기뿐만 아니라, 모든 삶은 예외 없이 저 오연한 죽음과 맞서고 있는 것이다. 과격한 비유겠지만, 새엄마가 아빠 몰래 젊은 정부의 손을 잡고 깨끗한 모텔을 찾고, 새아빠는 엄마 몰래 딸의 몸을 더듬는 순간조차도 그들은 그들 몫의 죽음과 결연하게 맞서고 있다. 모든 삶은 관성의 속도로 그렇게 진행된다.
소설가 김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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