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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8월 28일] 뜨겁고 길었던 여름의 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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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8월 28일] 뜨겁고 길었던 여름의 끝에

입력
2013.08.2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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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가까운 기자생활의 기억에서 여름은 늘 유별났던 것 같다. 공론의 장(場)에다 개인 소회나 늘어놓는 걸 용서한다면, 기자로서 첫 여름은 서울의 대홍수와 함께 왔다. 딴엔 아비규환의 수몰현장을 단독 취재하겠다는 과욕에 물살에 뛰어들었다가 한밤중에야 탈진해 구조됐다. 그때 쓴 생환기가 첫 기명(記名)기사가 됐다.

여전한 병아리기자이던 3년 뒤 87년 여름은 거대한 변혁의 시기였다. 끓어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 속에서 최루탄 연기에 우는 수십만 시민들 틈을 비집고 다녔다. 파편과 돌멩이로 비포장도로처럼 변한 서울시청 앞 광장을 이한열의 상여가 꽃 같은 눈물을 떨구며 지나갔다.

이후에도 여름은 쉬 넘어가지 않았다. 세계 재난사에 길이 남을 삼풍백화점 붕괴현장도, 온 나라를 뒤덮은 월드컵 열기의 현장도 한 여름 뙤약볕 아래였다. 일선을 떠난 뒤론 괜찮을 듯싶었다. 시원한 방에서 '우아하게' 글이나 쓰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웬걸, 일찍이 듣도보도 못했던 혹독한 여름이 돌연 찾아왔다.

무려 두 달, 한국일보 기자들은 올 여름 느닷없이 일터에서 내밀려 거리에서 폭염을 견뎌야 했다. 편집국 문은 잠기고 용역들이 대신 공간을 채웠다. 기자가, 신문이, 언론이 이토록 간단하게 그 존재가치를 부정당할 수도 있다는 현실에 다들 경악했다.

기자들은 매일 아침 함부로 남의 기사를 베끼고 고쳐서 채운 신문에 박힌 한국일보 제호를 보며 모멸감에 치를 떨었다. 현장의 땀과 기자의 영혼이 담겨있지 않은 신문은 저널리즘에 대한 모독이자, 국민과 독자에 대한 기만이었다. "신문은 중단될 수 없다"는 언론계 철칙이 있지만 이런 신문은 단 하루라도 세상에 내보여서는 안 될 것이었다. 원래 이 뜻은 어떤 외부적 힘에도 굴함 없이 신문은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뜻일진대.

당초 봄부터 시작된 기자들의 요구는 언론사 외피 속에 십 수년 누적된 비리와 불법으로부터 한국일보를 바로 세우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순정한 뜻이 편집국 폐쇄와 기자 축출, 엉터리신문 발행으로 응답 받았다.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결국 이럴 수는 없다는 사회적 공분이 굽은 모든 것을 펴서 제자리로 돌려 놓았다.

숨가쁘게 치달려온 이 여름의 기록, 이젠 다들 아는 이 과정을 새삼 복기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다.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국민과 독자들께 거듭 감사 드리면서, 신문을 바로 세우겠다는 다짐을 잊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과분한 성원은 한국일보가 선택한 중도(中道)의 가치가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준 계기가 됐다. 상업적으로는 확실히 불리한 길이어서 스스로도 가끔은 확신이 서지 않던.

중도는 종종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의 중관(中觀)사상에서 비롯한 중도 개념은 어느 한편 저만 옳고 저만 잘났다는 극단의 생각이나 태도를 배격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념이나 선험적 입장 없이 사안을 그 자체로 공정하게 보자는 의미다. 현학적으로 말하자면야 보다 적극적 실천개념으로 중용(中庸)과 구분하기도 하지만 통상적 쓰임새로는 뭔가에 매임이나 치우침, 걸림 없이 사안을 그대로 바르게 보자는 뜻에서 중도, 중용은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양 극단에는 진실이 머물 공간이 없으므로. 지난 두 달여 동안 여야 정파와 이념을 넘은 각계의 성원은 이 요구와 기대가 지금 얼마나 커져있는지를 실감케 해주었다.

어느 틈에 더위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한낮 노염(老炎)은 여전히 혀를 빼물 정도지만, 손 끝에 만져지는 바람은 한결 보송보송해졌다. 거리 풍경은 닦아낸 듯 투명해져 길바닥에 부딪치는 햇살과 가로수 검은 그림자의 대비가 그린 듯 선명하다. 도무지 올 것 같지 않던 여름의 끝이 문득 곁에 다가들었다.

아아, 그러고 보면 얼마나 길고 뜨거웠던가. 올해 여름도.

이준희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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