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관대하고, 패자는 침묵하라.' 한국일보 사태가 거의 마무리되고 신문이 정상 발행되던 시점에 탁월한 협상가였던 전직 정부 고위 관리가 식사 자리에서 들려준 말이다. 사태 이후 내부 갈등을 원만히 수습할 하나의 방법론으로 일러준 말일 게다. 문득 26일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발언록을 보면서 이 말을 대입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작금에는 부정선거까지 언급하는 데 저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는 발언을 보면 대통령은 민주당 국정조사 의원들이 지난 대선을 3ㆍ15 부정선거에 빗댄 데 대해 매우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하다. 최근 경색 정국을 풀기 위한 여야의 물밑 대화가 깨진 것도 분명 이 발언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게다. 공격수로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한 야당 의원들이 국정조사를 마치자 마자 청와대로 가 3ㆍ15 부정선거를 운운하는 걸 보면 과연 정치인답다 싶었다.
3ㆍ15 부정선거의 이미지는 곧 대통령 하야와 오버랩이 되는데, 이제 재판이 시작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사건을 보자면 야당 의원들이 적어도 3, 4단계를 건너 뛰어 내지른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이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있고, 원 전 원장이나 국정원 실무자, 김 전 청장과 박근혜 대선 캠프와의 연결고리가 드러난 것도 없다. 국정원 직원들의 댓글이 표심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계량화하기도 어렵다.
야당 일각에서 3ㆍ15 부정선거를 운운하는 기저에 대선 불복 심리가 깔려 있음은 불문가지다. 18대 대선 당시 야당은 질 수 없는 게임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100만 표 가량의 접전 양상이었던 만큼 야당 내에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검찰의 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를 계기로 대선 불복 심리를 갖게 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단계를 뛰어넘은 말이 선명해 보일지는 모르나 제3자가 보기에도 과하고, 민주적 소양이 부족한 걸로 비친다.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처럼 민주주의 근간을 흔드는 중요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주장과 행동을 보여야겠지만 국면에 어울리지 않는 말 한마디로 침묵보다 못한 결과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당이 대통령 사과와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 국정원 개혁, 진상규명 등 4대 요구조건을 걸고 광장 정치로 나간 지 27일째,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시국 현안을 다룰 양자회담을 제안한 지 23일만에 응답한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지도자의 도량과 승자의 관대함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한번 해보자'는 심리가 행간에 읽힐 정도로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민생과 거리가 먼 정치" "국민 분열" "정치 파행" 등 민주당을 겨냥한 표현들에서 파트너십은 읽히지 않는다. 야당은 삐걱대는 정치를 논해보자는데 민생이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다는 투다. 오랜만에 나온 대통령의 발언으로 여야 대치가 더 심해질 판이다. 민생법안을 통과시키고 나라가 굴러가게 하려면 야당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할 터인데 민생을 말하는 대통령이 거꾸로 국회 정상화와 민생의 발목을 잡는 양상이다.
여기서 승자의 아량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제언을 하자면 야당이 진상규명 차원에서 주장하는 특검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다. 사실 야당도 감탄한다는 검찰 수사에서 한가지 빠진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과 경찰의 축소ㆍ은폐 의혹 사건에서 정치권과의 연결 여부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정조사에서 김용판 전 청장이 대선 직전 국정원 댓글 사건 발표 전날 5시간의 수상한 점심을 가졌다는 야당의 의혹 제기에 김 전 청장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국정원 문제에 대해 대통령이 명쾌하게 '깨끗하다'고 한 만큼 야당 요구를 못 들어줄 이유도 없다. 야당이 쓸데없이 세금낭비를 한 셈이 된다면 10월 재ㆍ보선이나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이 표로서 그 결과를 보여주지 않겠는가.
정진황 정치부 부장대우 jh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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