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정치권을 향해 '민생 회담'을 제안했지만, 대치 정국이 쉽사리 풀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가정보원 개혁 문제가 핵심 의제가 되지 않는 한 민주당이 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의 회담 제안을 민주당이 즉각 거부한 상황만 보더라도 양측의 인식차는 상당하다. 무엇보다 현 정국에 대한 판단부터 다르다. 박 대통령은 "국민이 간절하게 원한다"며 민생을 강조한 뒤 국정원 개혁에 대해선 "강력한 의지를 갖고 거듭나게 하겠다"며 자체적인 추진 의지를 거듭 밝혔다. 정기국회에서 민생ㆍ경제법안 및 예산안 처리는 중요시하면서도 민주당이 장외투쟁에까지 나선 이유는 외면한 것이다.
반면 민주당 김관영 수석대변인은 "회담의 본질은 국정원 개혁"이라며 "민주주의 없는 민생은 사상누각"이라고 맞섰다. 지금의 대치 정국이 국정원의 불법적인 대선 개입과 경찰의 축소ㆍ은폐 수사 등 공권력에 의한 민주주의 유린에서 비롯된 만큼 이를 해소하지 않고선 정국 정상화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여기엔 서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여권 관계자는 "상대가 대통령인데 대통령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국정원장 해임을 요구하는 건 정치공세 이상의 진정성을 믿기 어려운 태도"라고 비난했다. 반면 민주당 핵심 당직자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커지니까 박 대통령이 면피용으로 (5자회담을) 다시 제안한 것 아니겠느냐"고 쏘아붙였다.
양측이 이런 식의 기싸움을 이어가면 9월 초 박 대통령의 해외순방 이전 회동은 어떤 형식으로든 성사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다. 여권은 이미 민주당의 대통령 사과와 국정원장 해임 요구에 대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을 거듭한다면 서로 주고 받을 게 없다"며 3자 회동을 박 대통령의 순방 이후로 미뤄놓은 상태다. 민주당 역시 "청와대가 국정원 개혁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며 조기 회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분위기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의 회동이 해외순방 이후로 미뤄진다면 지금의 대치 정국은 정기국회 파행으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있다. 이날 4개 상임위의 파행에서 보듯 결산 심사는 이미 정기국회로 미뤄졌고, 이에 따라 국정감사와 새해 예산안 심의, 각종 법안 처리 등이 줄줄이 지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벌써부터 민주당 내에선 "정기국회가 열리더라도 시정연설이나 국정감사, 상임위 활동 등 일정 협의에 순순히 나서지 말아야 한다"는 강경론이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황도 대치 정국의 장기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친박계 핵심인 김재원 전략기획본부장은 "청와대와 민주당 사이에 접점이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한숨만 내쉬었다. 다른 핵심 당직자도 "결국은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청와대에 한번 다녀와야 풀릴 것"이라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해온 박 대통령이 대화 가능성을 내비쳤다는 점에서 대화의 물꼬가 풀릴 여지는 남아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도 박 대통령과 여야 대표간 회동의 조기 성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실제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민생을 강조하면서 경제민주화를 거론한 건 야당의 관심사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사과와 국정원장 해임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국정원 개혁 문제도 테이블에 올릴 수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이는 민주당이 국정원 개혁과 다른 민생현안을 동급의 의제로 삼거나 박 대통령의 사과 요구를 유감 표명 수준에서 수용한다면 조만간 회담이 성사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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