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무렵이었다. 나는 선글라스를 끼고 십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날은 뜨겁고 살갗은 끈적했으며 발 밑의 그림자는 짧고 짙었다. 순간 팔에 바람이 스르르 닿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여름의 끝이구나. 햇살도 매미소리도 아스팔트의 열기도 전날과 다를 바 없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꿈틀거리며 몸과 마음을 습격하던 여름은 서서히 물러가는 대신 늘 이렇게 갑자기 끝난다. 잘 드는 칼로 싹둑 잘라낸 것처럼. 그 단면에는 뜨거운 무늬들이 굽이치는 것만 같다. 여름과 가을은 섞이지가 않는다. 여름은 그저 여름으로 끝날 뿐, 가을의 시작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날 밤에는 팔이 서늘하여 잠결에 이불을 끌어당겼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무더위와 씨름하느라 이불을 발치 쪽으로 밀어버린 것이 그새 며칠째였는지 모르겠다. 내게 여름의 끝은 잠든 몸을 이불자락으로 덮는 것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지 새삼 깨닫는 잠깐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불자락이 아니라면 겉옷을 벗어서라도, 그도 여의치 않다면 신문지라도 덮고서야 잠든 몸은 사람의 몸으로 유지되는 게 아닐까. 이불을 덮을 수 없던 길고 긴 여름의 밤에 나의 잠든 몸은 고양이나 늑대로 변해 있지는 않았을지. 이제는 잠 속에서도 사람의 삶을 이어갈 시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이불을 덮고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은총처럼 여겨지는 시간, 여름의 끝인 것이다.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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