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가 쪽 내력인 통짜 허리를 물려받아 옷 맵시가 안 난다? 아들이 욱하는 아버지 성격을 빼닮으면 어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단명하셨는데 나는 장수할 수 있을까? 등등. 사람들은 타고 난 자신의 모습이 탐탁지 않을 때, 흔히 유전자(DNA) 탓으로 돌리거나 생겨먹은 대로 살 수밖에 없다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야말로'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인 셈이다.
실제로 많은 유전학자들이 성격이나 체질 등은 유전적으로 미리 결정돼 있다고 주장해왔다. 생명체는 모두 DNA의 꼭두각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60년 전인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내자, 사람들은 이제 곧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생명의 신비가 드러날 것이라며 흥분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오히려 'DNA가 생명체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가설에 오류가 많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등장한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운명결정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후성유전학자들도 생물학적 운명, 즉 육체와 정신을 주관하는 유전 프로그램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만 유전에 관한 숙명론에 반기를 든 것이다.
독일의 신경생물학 박사이며 과학저널리스트인 저자는 인간이 컴퓨터라면 DNA는 하드웨어일 테고, DNA를 운용하는 소프트웨어도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하드웨어인 DNA를 적절하게 활용하도록 돕는 소프트웨어가 바로 세포의 유전체(게놈) 위에 존재하는 '후성유전체'라는 것이다.
후성유전학자들은 후성유전체를 한마디로 'DNA를 켜고 끄는 스위치'라고 정의한다. 어떤 DNA가 어느 시간에 어떻게 활동할지 결정해, 생명이 환경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DNA를 조종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후성유전체는 한 세포가 빠르게 노화할지 느리게 노화할지, 외부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할지 둔감하게 반응할지, 쉽게 질병에 걸릴지, 자신의 과제를 오래도록 수행할지 등을 프로그래밍하기도 한다.
실제로 많은 유전학자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후성유전체가 세포를 재편성(리프로그래밍)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게다가 세포가 재편성되는 시간이 수만 년이 걸린다는 찰스 다윈의 고전적인 진화론 이론과 달리 몇 년 내에서도 바뀐다는 것도 알아냈다.
저자는 대표적인 사례로 일란성 쌍둥이에 대한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킹스칼리지 쌍둥이연구소 소장인 팀 스펙터 교수는 '메틸화'라는 후성유전체의 작용에 의해 몸 속에서 DNA의 활동이 억제되거나 약해져, 동일한 DNA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라도 생활방식이나 기호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
저자는 "후성유전학의 발전으로 우리의 삶이 송두리째 바꿔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잘못된 후성유전학적 프로그래밍을 재편성하는 약물이 개발되면 암이나 우울증 등 수많은 난치성 질병까지 쉽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DNA에 영향을 미칠 기회를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몸에 대해 그렇게 자유롭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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