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오는 눈 먼 자들의 세상에서 아주 유용한 수단이다. 우리는 선하다, 저들은 나쁘다, 그런데 저들이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선한 자들이 궐기하라. 밑도 끝도 없는 선악의 낙인 찍기를 받아들이면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저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저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그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된다. 눈 먼 자들은 '우리'에게 은혜를 입은 바 없고, '저들'에게 손해를 당한 바도 없는데 전장의 맨 앞에 서서 죽기살기로 싸운다. 싸움은 눈 먼 우리와 저들의 몫이지만, 승패의 결과물은 증오를 부추긴 자들이 나눈다.
이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있었던 증오의 정치학이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교리의 작은 차이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중세 종교전쟁, 조선인들이 재난을 틈 타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헛소문으로 무고한 조선인 수만 명이 살해된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레닌 사후 반동세력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된 스탈린 대숙청 등 그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우리의 역사도 그렇다. 부관참시까지 서슴지 않았던 조선시대 4대 사화(士禍)가 그렇고,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됐던 해방 직후의 좌우 대립도 그랬다. 과거만 그런 게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 보수와 진보로 갈려 사사건건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정치와 언론이 끼어들어 사소한 차이를 부풀려 큰 싸움으로 키우는 우리 사회야말로 증오가 판치는 눈 먼 자들의 세상이다.
증오의 기법 중에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지역주의다. 이념 대립은 알량한 사상과 고민이라도 담고 있지만, 지역주의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저 태어난 곳에 따라 무리가 지어지고, 우리와 저들이 나뉘는 황당하고도 저급한 구분만 있다. 하지만 어쩌랴, 저급한 낙인 찍기가 여전히 먹히니. 마치 시체가 관에서 일어나듯 잊을만하면 지역주의가 고개를 든다.
며칠 전 새누리당 조명철 의원이 국회 청문회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를 맡았던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에게 "광주의 경찰이냐"고 추궁한 것이 그랬다. 권 과장의 증언이 사실과 부합한지를 따지면 될 일인데, 출신지를 들먹이는 것은 증오를 부추기는 수법에 다름 아니다. '광주 경찰' 운운은 증오의 정치학에서 쓰는 수법대로 '권 과장은 저들의 사람이니 그의 증언이나 의견은 듣지도, 믿지도 말라'는 것이다.
한심한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후 청와대나 새누리당이 조 의원을 질책하거나 제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파생할 후유증을 염려해 저격수들의 사기를 고려한 때문이겠지만, 지역주의까지 엄호할 정도로 여권이 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역주의가 심각해질수록 이를 극복해낼 영웅을 기다리는 심리도 커진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지역주의가 조금씩 완화하자, 이명박 정부 초반 아예 종지부를 찍자는 기대감이 확산된 바 있다. 이 전 대통령이 TK 권력의 본산인 경북고를 나온 것도 아니고 독학으로 대학을 졸업한데다 전 세계를 상대해 샐러리맨 신화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TK도 아닌 '영포(영일ㆍ포항)'로 치중하는 작은 모습을 보였다.
이런 아쉬움을 몇 년 전 평의원이던 박근혜 대통령을 사석에서 만나 토로한 바 있다. 아마 박 대통령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 때 "지역주의는 박정희 시대의 책임도 있다. 지역개발과 인사가 쏠리면서 지역갈등이 심화했다고 본다. 만약 대통령이 되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얘기를 했다. 박 대통령은 껄끄러운 주장을 담담하게 듣더니 "나는 지역에 빚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그 발언에 매료됐다. 지금도 박 대통령은 그런 마음가짐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도자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법. 편을 갈라 쉽게 싸울 수 있다는 지역주의, 그 비루한 마력을 떨쳐버리고 한국 사회에 증오의 덫을 벗기는 정치를 해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해본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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