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글쟁이가 있다. 한국사회의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가 냉전의 유물이라고 푸념하며 자유주의자를 자청하는 이다. 하지만 그는 글을 써야 할 때는 허투루 뭉개는 법이 없다. 보수 대 진보의 대립구도도, 푸념은 눌러둔 채 예리한 인지와 분별로 돌파해낸다. 시야가 좁은 저널리즘적 논란의 관행 깊숙이 철학의 낚싯대를 드리워 인간을 구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묵직한 진격 이후에는 역시나 자유주의자답게, 어쩐지 경쾌한 결론에 이르는 그의 글을 나는 교본으로 삼아 왔다.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 오랫동안 소위 보수 언론에 적을 두었으나, 지금은 줄곧 소위 진보 언론에 기고를 하는 이유였다. 현직을 떠난 후 점점 더 보수와 진보를 거칠게 가르는 시대착오와 허구성에 넌더리를 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더욱 궁금했다. 당신의 입장은 뭔가요, 라고 어느 날 물었을 때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오래 전 그에겐 소위 '빨갱이' 같은 동생이 있었고, 동생은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에 부적응해 서서히 죽어갔으며, 자신은 그 죽음을 막지 못했노라고. 이 경험이 완고하나마 이상을 좇는 인간을 살려야 한다는 부채감으로 남았고, 그것이 그가 진보의 자장 안에서 글 쓰는 동기라는 것이었다.
한국일보 사태로 아무것도 쓸 수 없었던 동안, 쓰는 일의 관성을 서서히 잃어가면서, 나에겐 쓴다는 것이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는 기억이 되돌아왔다. 정확하거나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기자라는 직업과는 안 어울리게 대체로 엄두를 못 내고 우왕좌왕하는 쪽이었다. 그러니 봉쇄된 편집국 앞에서, 우리를 취재하러 온 다른 언론매체에 진심과 의무감이 뒤섞인 수사들을 동원해가며, 다시 쓰고 싶고 다시 써야 한다고 고할 때마다 두려움도 불쑥불쑥 찾아 왔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줄곧 내가 좋아하는 글쟁이를 생각했고,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를 다시 읽었다. 오웰은 소설가가 되기 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제국경찰로 복무, 미얀마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당시 경험한 제국주의의의 본질과 세계의 부조리한 구성에 천착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총을 놓고 영국에 돌아온 후에도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계급의 문제를 몸소 겪었다. 는 이 와중에 글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던 예리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이를 테면 이런 순간. 오웰은 미얀마에서 인도인의 교수형을 집행하면서 처음으로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 사형수가 교수대로 향하다가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키자 오웰은 생각한다. "그의 모든 신체기관은 미련스러우면서도 장엄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와 우리는 같은 세상을 함께 걷고, 보고, 듣고, 느끼고, 이해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2분 뒤면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중 하나가 죽어 없어질 터였다. 그리하여 세상은 그만큼 누추해질 것이었다." 사형 집행 후 오웰을 비롯한 간수들이 "업무를 마친 것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며" 어울려 한잔 하러 가는 명랑한 장면은 뒤따라 오는 "죽은 자는 100야드쯤 떨어져 있었다"라는 단 한 줄의 문장으로 처참해진다. 그러니까, 쓸 수밖에 없는 경험들이 있다. 일반적 사정과 마땅한 이치의 어긋남, 인간성의 뒤틀림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든 납득하고 싶어서, 쓴다. 혼돈이 깊고 궁리를 거듭할수록 글에는 보편성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글쟁이와 오웰에겐 공통적으로 맹목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웰은 "살아있는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라며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라고 고백한다. 이런 집념이 개인적 욕구에서 출발한 글을 세계의 정의와 윤리를 회복하려는 지향으로까지 끌고 나간다. "어떤 사회를 향해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가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오웰의 정의에 동의하자, 깨달았다. 내가 교본으로 삼았던 글들은 대체로 정치적인 글들이었다는 것. 지금, 빼앗겼던 신문지면을 대하는 책임감이 무겁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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