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양국 관계가 싸늘하다. 과거처럼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회복되리라는 기대도 섣부르다. 활발한 양국의 민간 물적ㆍ인적 교류가 정부 간 관계 회복을 촉진했던 공식에 금이 가고 있다. 대신 정부 간 관계 악화가 상대국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부채질하고, 그런 국민 인식이 다시 외교관계 악화를 부르는 악순환 구조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얼마 전 산케이 신문의 여론조사 결과는 충격이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대금을 낸 데 대해 응답자의 62%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더욱이 8ㆍ15 전몰자 추도식에서 역대 총리들과 달리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한 반성이나 부전(不戰) 결의를 밝히지 않은 데 대해 50%가 타당하다고 응답한 반면 타당하지 않다는 응답은 36%에 그쳤다.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한국과 달리 일본 언론은 여론조사를 외부 전문기관에 맡기지 않고 담당 조직을 통해 직접 행한다. 산케이 특유의 반한(反韓)ㆍ반중(反中) 노선과 설문 내용에 따라 얼마든지 조사기관의 의도에 부합하는 응답을 얻어낼 수 있는 여론조사의 속성을 감안하면 적잖이 '유도된' 결과일 수 있다. 다만 그런 왜곡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여론조사에 나타난 일본 국민의 인식은 커다란 변화를 일깨운다. 6년 넘게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접촉한 결과 '알고 믿게 된' 10여 년 전 일본 국민의 인식은 이번 여론조사 결과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무엇이 이런 의식의 변화를 불렀을까. 수없이 지적된 장기 경제침체와 중국의 부상에 따른 자신감 상실을 빼고 나면 우선 떠오르는 게 민주주의의 한계다. 국가와 국민의 먼 장래를 겨냥한 이성적 판단은 감각과 정서를 자극하는 선동적 구호에 밀려나기 십상이다. 독일의 나치즘이나 아르헨티나의 페로니즘 등 역사의 수많은 오류가 모두 '국민의 뜻'을 기초로 이뤄졌다. 일본 민주주의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건실한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인 '개인의 발견'을 건너뛰었다. 더욱이 1994년 소선거구제 도입 이후 자민당의 압승, 민주당의 압승과 정권교체, 지난해 자민당의 총선 압승 등 급격한 정치변화를 불렀다. 올 초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렌이 중선거구제 부활을 골자로 한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포퓰리즘에 취약한 소선거구제의 특성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1945년 패전 이래 이른바 '자학사관'을 극복해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대 보유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자는 정치ㆍ사회 세력은 늘 있어왔다. 사회당(현 사민당)과 공산당 등 야당은 물론이고 자민당 주류파가 그런 움직임을 제약했고, 국민 의식도 그에 따라 안정상태를 지속해 왔다. 계파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당선자는 보장했던 중선거구제와 달리 소선거구제는 자민당 주류파의 교체와 정권 교체를 함께 불렀다. 정치적 선동의 효과가 커지고, 국민 의식의 쏠림 현상도 쉬워졌다.
한편으로 보수우파의 노선과 주장이 국민에 먹혀 들기 시작한 후 그 확산을 도운 것은 '역사 피로증'이다. 패전 60주년(2005년)과 강제합병 100년(2010년)을 넘기고도 한중 양국과의 역사 화해에 이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현 전망도 밝아지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는 사죄와 반성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않더라도 일단 그 수준에서의 화해로 이어가지 못해 최소한의 빌미를 제공한 우리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반성과 용서는 동전의 양면이지 따로일 수 없다. 최근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에서 밝혔듯, 군대위안부 동원의 실상은 우리 국민의 일반적 인식과는 다르다. 다양한 실상을 외면한 채 전면적 강제동원을 상정한 반성과 사죄, 보상 요구는 일본 내 '반일(反日)'지식층에까지 역사 피로증을 퍼뜨릴 만하다. 실상을 인정해도 위안부 범죄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도덕적 자신감에 기초한 금도(襟度)로 아베 정권의 반한 선동만큼은 차단하자.
황영식 논설위원실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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