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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8월 22일]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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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8월 22일] 코스모스

입력
2013.08.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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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주위의 코스모스를 솎아 마당에 옮겨 심었다. 장맛비에 웃자란 풀과 경쟁한 코스모스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미안한 마음에 마당의 풀을 뽑아주었다. 코스모스에게 간격을 넓혀주고 하늘을 열어주었다.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살짝 가리고 수줍게 웃는 첫 사랑 소녀가 돌아왔다. 방충망으로 밀려들어오는 풀벌레소리가 서글퍼졌다. 중년 남자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으면, 이미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거라고 말하던 동료시인의 쓸쓸한 목소리도 들려온다. 잠이 안 와 열 걸음이 될까 말까한 마당의 코스모스 길을 걷는다. 땅보다 하늘이 훨씬 많았다고 노래한 동료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른다. 텐트가 든 배낭을 짊어지고 역주행으로 국도를 걷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아침이슬에 젖은 코스모스 봉오리에 코를 대본다. 그리운 사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고 싶어진다. 피지 않은 코스모스 봉오리를 따 얼굴에 터뜨리고 싶어진다. 코스모스 농축향이 얼굴에 퍼진 잠깐 동안만이라도,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활짝 웃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까운 사람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코스모스 꽃처럼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어느 해 이맘때, 나는 7번 국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와 딸이지 싶은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해안 쪽으로만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보조의자에 어린 딸을 앉힌 아비는 역주행을 감행하고 있었다. 아이는 양손을 아비는 한 손을 내밀어 코스모스를 쓰다듬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마냥 웃는 낯이었다. 페달을 밟을 때마다 체인 집이 긁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외버스가 달려와도 그들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버스는 코스모스를 헤치고 다가와 그들을 피해 달아났다. 아비의 모자가 날아가고 가발이 날아갔다. 자전거를 세운 아비가 가발을 잡으러 따라가고 아이는 모자를 따라갔다. 허둥지둥 가발과 모자를 눌러쓴 아비와 딸아이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자전거 짐칸에는 제수용 북어포가 고무 바에 묶여 있었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이라도 한 순간의 행복 때문에 기나긴 불행을 견딜 수 있는 것이리라. 지금 불행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행복을 꿈꿀 수 있는 것이리라. 코스모스 꽃잎을 보면 천천히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어느 순간 헬리콥터가 불행한 나를 태우고 이륙할 것만 같은 것이다.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것인가 돌아본다. 나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욕망의 노예로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누구의 자식이면서 누구의 형제이고 친구인 삶. 대체 인간답게 사는 게 어떤 것인가. 하나하나 꽃잎을 떼어내면 아무것도 아닌 지금의 내 모습이 나올 것 같아 두렵기만 하다. 온전히 꽃잎을 지켜내야 씨앗을 맺을 것 같은 코스모스를 보면서 물어본다. 언제 바람은 불어오고 우리는 언제 웃을 수 있는가.

고향 집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중학교 앞 과속단속 카메라에서 속도를 줄였다. 경운기 한 대가 속도를 줄여 코스모스 핀 길을 역주행하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더 줄이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경운기 짐칸엔 고무대야와 물주전자, 가스버너와 찜통, 밥그릇 국그릇, 말아서 묶은 포장이 실려 있었다. 참깨를 털러 가는 모양이었다. 농사꾼 부부는 경운기 의자에 사료부대를 깔고 앉아 있었다. 서로의 머리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적외선차단 모자 차양 속에서 흰 치아가 빛나고 있었다. 내가 지나온 모든 코스모스 길은 사라지고 없었다. 백미러에서 젊은 농사꾼 부부의 모습이 작아지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행복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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