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로마시대 전차경주가 유행했다. 네 마리의 말이 나란히 서서 하나의 전차를 끌고 달리는 시합이다. 크지 않은 타원형 경기장을 여러 바퀴 달려 제일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는 마차가 승리를 차지한다. 몇 개 팀이 한꺼번에 경기장을 달리니 한 팀이 된 네 마리 말의 속도와 방향이 조화롭게 제어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시합을 앞둔 네 마리 말들에게 전차에 오를 기수가 다가간다. 가장 안쪽을 달릴 말에게 말한다. "빨리만 뛰어선 안 된다. 특히 회전할 때는 동료들을 생각하여 잠시 속도를 줄이는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맨 바깥쪽 자리를 잡게 된 말에게 속삭인다. "동료들보다 훨씬 많은 거리를 더 빨리 달려야 한다. 너는 누구보다 지구력이 뛰어나지." 가운데서 달리게 될 두 말의 잔등을 쓰다듬는다. "양쪽의 동료가 서로 멀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안쪽 동료가 속도를 줄일 땐 같이 줄이고, 바깥쪽 동료가 속력을 높일 땐 함께 높여야 한다." 그리고는 모두에게 덧붙인다. "물론 직선코스에선 같이 맘껏 질주해야지." 영화 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장면의 기억을 풀어보았다.
전차경주에서 빠르게 달리는 네 마리를 모두 모았다고 팀이 승리하지 않는다. 그 가운데도 순발력이 좋은 놈, 지구력이 뛰어난 놈, 균형감각을 갖춘 놈 등이 제 역할을 다하고 조화를 이룰 때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 가정은 물론 회사도 그렇거니와 사회나 국가도 다르지 않다. 단체경기의 승부는 구성원들이 각자 다른 제 역할에 모두 얼마나 충실하냐에 달려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옆 사람의 일이 좋아 보인다고 기웃거리고, 다른 분야의 역할이 칭찬거리가 될 듯하여 집적거린다면 승리는커녕 존재감마저 흩어질 수밖에 없다. 내부의 갈등과 분란으로 본연의 일과 역할이 아예 뒷전으로 밀려버리기 때문이다.
최근 국정원의 대선 개입 의혹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온 나라가 갈등과 분란에 휩싸여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국정원이 본연의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엉뚱한 곳을 기웃거리고 집적거린 때문이다. 누가 시켰든 스스로 찾아서 했든, 어느 경우라도 국정원의 존재 이유마저 허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전차경주의 말들에 비유한다면 제 역할은 염두에 두지 않고 딴 생각을 품고 이리저리 마구 내달린 꼴이다.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국회청문회도 다르지 않다. 진상 규명을 거쳐 문제점을 파악하여 국정원 제도를 개혁해보자는 게 본연의 목적인데 행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여야간에, 질문자와 답변자간에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승부욕만 드러내고 있으니 갈등과 분란이 없을 수 없다. 주위의 팀들은 안중에 없고 네 마리 말이 서로 잘난 척 머리를 내밀려고 다투는 꼴이다.
경제살리기ㆍ창조경제 이슈에도 비슷한 생각이 미친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박근혜 정부를 출범하게 한 중요 동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선창(先唱)에 따라 정부의 모든 부처가 "경제! 경제!"를 합창하며 나서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부 부처의 경우 예산을 쓰는 게 본연의 임무이면서 업무보고와 사업계획에서 경제살리기와 창조경제로 돈을 벌겠다고 나서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순발력과 지구력과 균형감각이 따로따로 요구되는 상황에서 네 마리 말 모두가 앞으로만 전력 질주하니 전차가 경기장을 제대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꼴이다.
최근 한국일보 사태를 겪는 내내 어릴 적 보았던 영화의 그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주필의 역할은 사시(社是)를 지키는 일입니다." 어느 후배 기자가 던져준 말이 가슴에 들어와 박혀 있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정신, 정정당당(正正堂堂)한 보도,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자세, 한국일보의 사시다. 200여명의 기자들이 옆으로 나란히 서서 한국일보라는 마차를 끌어가고 있다. 각자의 역할이 같을 수 없고 같아서도 안될 일이다. 주필은 '사시를 지켜 내는 문지기'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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