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은 1991년 채택한 기본합의서 첫머리에 남북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이 같은 개념은 이후 20여 년간 남북관계를 지배하는 도그마로 자리잡았다. 북한이 멋대로 행동하거나 약속을 어겨도 엄중하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체제 차이에 따른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보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박근혜정부가 '국제룰'을 대북정책 기조로 내세운 것은 이러한 관행을 고쳐보기 위해서다. 북한과 대화 테이블에 마주앉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정과 절차가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이견을 좁혀 접점을 찾거나 합의를 이행하는데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더라도 남북관계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는 논리다.
지난 6월 남북당국회담을 앞둔 실무접촉 과정에서 수석대표의 '격'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다 회담이 무산된 것이 단적인 예다. 정부 관계자는 16일 "남북관계는 상당부분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며 "북측에서 우리측과 직급이 맞지 않는 사람을 고위급 회담 대표로 내보내면 협상이 헛돌고 시간만 허비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국제룰-신뢰프로세스간 선순환
국제룰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북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도 직결돼 있다. 국제룰은 남북이 함께 지켜야 할 원칙이고, 이를 통해 비로소 신뢰를 구축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룰을 준수해야 신뢰가 싹트고, 신뢰를 통해 화해와 협력의 범위가 넓어지면 이를 발전시키기 위해 다시 남북간에 적용되는 국제룰이 공고해지는 선순환 구조다.
국제룰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불안정성과 위협을 줄이고 북한에 대한 외부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남북관계를 제도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이다.
황지환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북한은 대남관계에서 적당한 핑계만 대면 언제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남북간 양자관계이지만 북한을 장기적으로 시스템 차원에서 붙잡아두기 위해서라도 국제룰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제룰은 북한에도 이득
이처럼 국제룰을 통해 남북 모두 이익을 얻는 '윈윈게임'이 가능하다. 북한의 입장에서도 국제룰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 되고 있다. 북한이 14일 7차 당국회담에서 그간 우리측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개성공단 국제화에 합의한 것은 국제룰에 대한 긍정적 태도변화로 보인다.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서구 경험이나 최근 의욕적으로 마식령 스키장을 개발하는 사례 등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한다.
무엇보다 북한은 지난 3월말 '핵무력-경제건설'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한 이후 경제부문에서 개혁ㆍ개방적인 요소를 강화하고 있다. 또한 기존의 나선과 황금평, 개성 외에 신의주와 남포, 금강산, 백두산, 원산 등으로 경제ㆍ관광특구를 확대할 것으로 알려졌다. 외자 유치를 비롯한 외부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북 투자는 아직 요원하다. 법과 제도, 이를 보장할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강조하는 국제룰은 북한의 안정적 투자기반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개성공단이 커질수록 더 큰 이득을 누릴 수 있고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일원이 돼야 경제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에 원하지 않아도 국제룰을 따라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김광수기자 rolling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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