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이에요, 중독"전남 해남~강원 고성 종단 대회 하루평균 1시간 쪽잠 자면서 150시간 내 주파해야 완주 인정"스트레스가 사라져"깊은 밤 산속을 혼자 달리면 살아오면서 묻었던 오물들이 다 툭툭 떨어지는 것 같아"기록보다는 완주"풀코스 기록 욕심은 버리고 잘 뛰고 못 뛰고를 떠나 함께 달리면 즐기고 싶었어요"가족이 함께 달려요"12인승 승합차 타고 총출동 쌀^양념^라면 등 가득 "다른 선수들도 먹게 해야죠"
'쿠아아아앙.' 굉음과 함께 빛처럼 질주하던 덤프트럭이 이명희(48)씨 바로 옆을 스쳐간다. 7월 12일 오후1시, 강원 인제군 인제터널 안. 이씨는 폭 40㎝쯤 되는 인도를 따라 위태롭게 달린다. 하지만 과연 '달린다'고 해도 될까. 주행의 포즈는 의지일 뿐, 그의 속도는 보행에 가깝다. 몽환적인 나트륨 조명 안에서 그는 환영 같기도 했다.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서 출발한 지 6일째. 545㎞를 달리는 동안 체력은 거의 바닥났지만, 아직 77㎞를 더 가야 한다. 기어서라도, 제한시간 안에!
차량 소음으로 귀마저 먹먹해진 채 터널을 빠져 나오자마자 이씨는 양 손바닥을 펼쳐 들고 장맛비를 받았다. 그 물로 땀과 먼지를 씻었다. 내처 달리려나 싶더니 안 되겠다는 듯 44번 국도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앞서가던 주자가 되돌아와 이씨의 종아리를 주물렀다.
-왜 뛰세요?
"허억, 허억~"
발끝서부터 허리로 올라오는 통증 때문일까, 피로 탓일까, 아니면 질문이 어이없어서였을까. 그는 낮고 거친 숨소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제에~"
같은 날 밤 11시. 태백산맥을 넘는 해발 520m 진부령 정상 부근서 을씨년스러운 노래 가락이 울려 퍼졌다. 왕복 2차선 도로에서 한 사내가 붉은 경광등을 배낭에 꽂고 절뚝거리며 고갯길을 오르고 있었다. "잠이 와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신옥(54)씨다. 그의 두 무릎에는 근육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다.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아 글쎄, '이제 절대 울트라 (마라톤) 안 할 거야'그랬는데 또 뛰고 있다니까요"라며 웃었다. 길가의 산채비빔밥 집들도 셔터를 내린 지 오래. 드물게 지나치는 차의 승객들이 헛것이라도 본 듯 힐끔거렸고, 이씨는 아랑곳없이 빗속의 고갯길을 구불구불 휘청휘청 나아갔다. 가로등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길 아래 계곡 물소리와 그의 비옷 스치는 소리 안에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끼어들곤 했다.
'2013년 대한민국 종단 622㎞ 울트라마라톤대회'가 7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7일간 한국울트라마라톤연맹 주최로 열렸다. 1인당 참가비 60만원(비회원 기준)을 낸 총 81명의 주자들은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부터 강원 고성 출입국관리소까지 전국을 사선으로 가르는 이 무지막지한 코스를 150시간 내에 주파해야 한다. 산술적으로 보자면 성인 보행속도와 흡사한 시속 4.15㎞로 쉼 없이 걸으면 된다. 하지만 자고 먹고 싸고 씻어야 한다. 안 먹으면 못 뛰고 안 씻어도 못 뛴다. 땀의 염분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를 긁어, 염증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라톤 풀코스 완주 경력이 100회가 넘는 고수들도 종반이 가까워지면 축적된 피로 때문에 걷는 시간이 늘어난다.
가장 만만한(?) 게 잠이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 1시간 남짓. 차만 없다면 길바닥도 마다 않는 그들에게 완행버스 간이정류장에서의 쪽잠은 호사스런 휴식이다. "달리는 차 바퀴에 다리를 집어 넣고 싶다"는 이도 있었고 "교각 아래 계곡으로 몸을 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도대체 왜 달릴까.
▲ 왜 뛰냐건 그냥 웃지요
-왜 600㎞나 뛰시는 거예요?
"감기 안 걸리려고 뜁니다. 예전엔 잔병 치레가 많았어요"
-마라톤만 해도 충분하잖아요?
"그렇죠. 미친 짓이에요 허허허허. 이거 하고 끝이에요. 이제 이거 하면 안 합니다."
11일 오후 11시 500㎞ 구간 CP(Check Point)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다시 길에 오른 홍정의(63)씨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마라톤이 있다는 건 오래 전 TV에서 극지마라톤 중계를 보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대회가 있을까 하고 찾다가 알게 된 거란다. 지난해 537㎞ 구간도 완주했다는 그는 이번 대회를 위해 매일 새벽 4시40분에 눈을 떠 출근길 15㎞를 달렸다.
같은 시간 박채규(55)씨는 500㎞ CP에서 의료봉사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발바닥의 물집, 그 속에 다시 난 물집에 바늘을 찌르자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무표정했다.
-안 아프세요?
"시원해요"
-풀코스 마라톤으로 만족이 안되세요?
=(1분 넘게 대답이 없다) "중독, 중독이라고 봐야죠."
"잠깐 자야겠다"며 자리를 뜬 박씨의 울트라마라톤 경력은 8년. 그 전 완주한 풀코스 마라톤만 163회라고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너 그러다 죽는다'는 말을 심심찮게 듣는다고 했다.
-울트라마라톤하는 건 미친 ?이라는 사람도 있던데요?
"절대 공감 못하죠. 해마다 비슷한 코스를 뛰니까 코스 주변 주민들은 '저 미친놈들 또 뛰러 왔다'고 하는데 취미나 예술도 그렇지만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럼 왜 뛰세요?
"깊은 밤 산속을 혼자 달리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아오면서 묻었던 오물투성이, 스트레스가 내가 달려 온 길에 다 툭툭 떨어지는 거 같아요. 그게 좋아요."
서상돈(53)씨는 제 몸도 못 가누면서 또박또박 대꾸했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나아갔다.
'건강을 위해서''자녀들에게 한계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가능할까 하는 호기심 때문에'…. 대충 예상 가능한 대답들이 이어졌다. 달리는 김에 국토 종단 2코스와 횡단 1코스를 모두 완주하는 '그랜드 슬램'을 목표로 한다는 이도 많았다. 마음 같아선 한 두 시간 붙잡고 궁금한 것들을 한껏 캐묻고 싶었지만, 500㎞가 넘게 달려 온 사람들에게 할 짓이 못됐다.
▲ 서브 스리냐 울트라냐
서브 스리(Sub Three). 마라톤 풀코스 42.195㎞를 3시간 내에 주파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영예다. 연인원 200만 명 남짓 되는 국내 마라톤 대회 참가자 가운데 상위 2% 미만에게만 허용되는, 말 그대로 '철각 보증서'다.
왜 그들은 서브 스리가 아닌 울트라를 택했을까.
이만식(50)씨는 국내 최초 100㎞ 이상 울트라마라톤 100회 완주 기록자다. 그는 200㎞, 300㎞, 600㎞ 등 울트라 148회를 완주했다. 연습 빼고 공식 대회에서만 15만여㎞를 달린 셈.
-기록 단축 욕심은 없었어요?
"울트라를 시작하면서 (서브 스리) 욕심을 내렸어요. 한창 잘 뛰던 시기에 3시간 6분대까지 기록했지만 제가 지금 이 나이에 국가대표를 하겠습니까. 다들 조금만 더 하면 된다고 격려했지만 잘 뛰고 못 뛰고를 떠나 즐기고 싶었어요. "
-울트라도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거 아닌가요?
"(다른 주자를) 경쟁자로 보면 울트라는 100% 부상으로 탈락해요. 자기페이스를 오버할 수 밖에 없거든요. 대신 나한테 쓸모 없는 배낭 속 근육 테이프 하나가 다른 사람을 낙오에서 구하기도 합니다. 그게 울트라의 매력이죠."
이씨는 베테랑답게 이번 대회에서 다른 초보 참가자의 손을 잡아 주거나 자신의 배낭 끈을 잡고 뛰도록 배려하며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냥 마라톤보다 울트라가 더 좋은 이유가 뭐예요?
"모든 분야는 재능이 중요하지만 울트라마라톤은 땀이 더 많은 힘을 발휘하는 영역이에요. 다른 어떤 종목보다 노력에 공평하니까."
송근중(54)씨는 서브 스리에 급급했던 이들 중에 '벼락치기 연습'으로 몸을 망치는 경우를 자주 봐 왔다고 했다. 울트라마라톤 참가 자격은 기록이 아닌 경력이다. 100㎞ 코스에 참가하려면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야 한다. 이번 대회 역시 200㎞ 이상 코스를 완주해 본 사람에게만 출전 자격이 주어졌다.
이렇게 대답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 나이에, 제 몸 상태로 서브 스리는 불가능하단 걸 알아요. 몸이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하고 연습량도 어마어마하고요. 이건 혼자 달리는 게 아니니 대화를 하고, 그래서 외롭지 않아요. 참 재미있게 뛰어요." 김미순(53)씨.
"좀 더 빨리 달린들 자기 자신만 놓고 보면 2시간 59분과 3시간 1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기록 단축 노력도) 해 봤지만, 누군가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영옥(54)씨.
스포츠를 경쟁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들에게 울트라마라톤은 스포츠가 아니다. 그들에겐 남보다 빨리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없다. 완주만 있다. 여기서 시합의 모든 룰이 바뀐다.
▲ "내 남편만 챙겨 먹일 순 없잖아요"
12일 새벽 0시 50분, 500㎞ CP인 강원 홍천군의 한 모텔에서 조명을 흔들며 주자들을 맞이하던 진행 요원 한 명이 코스 반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각 50㎞구간마다 도달해야 하는 컷오프 시간이 10분 밖에 남지 않았지만 아직 4명의 주자가 들어오지 않아서다.
"됐어 석배 형, 형은 살았어. 10분 남았어 10분!"
끝에서 네 번째 주자를 확인한 후 그는 다시 전속력으로 역주행, 탈락 위기의 주자들을 찾아 나섰다. 마지막 한 사람, 한철호(58)씨를 발견한 것은 1㎞ 이상 떨어진 곳이었다. 한씨는 두 발을 땅바닥에 끌고 있었다. 진행요원은 "차 더 바짝 대서 길 밝혀요. 형 빨리 빼, 할 수 있어 빨리!"라며 재촉했다. 그리고 한씨의 배낭을 잡고 앞으로 밀기 시작했다. "이야아!" 연거푸 함성을 지르며 한씨는 사력을 다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0시 57분 통과. 그는 낙오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모텔 주차장 구석에선 강희정(43)씨가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집에 있으면 걱정 되니까, 옆에서 응원해 줘야죠."
전북 남원에서 주자인 남편 전준섭(50)씨와 함께 정육점을 운영하는 榴?벌써 나흘 째 밤마다 딸과 함께 응원방문을 이어오고 있었다. 낮에는 장사를 하고 밤이 되면 전북 남원에서 정읍, 대전, 충북 충주, 강원 홍천까지 차를 몰고 와 남편을 마중했다.
-말려 본 적 없으세요?
"'왜 자꾸 뛰냐'고 물으면 저보고 한번 뛰어 보래요, 나 참. 말려도 어차피 갈 거니까. 그래도 구간 통과하면서 들어올 때 활짝 웃는 모습이 고기 썰 때보다 훨씬 행복해 보여요."
강씨는 웃으면서 바쁘게 삼겹살을 뒤집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무렵, 모텔방의 단잠도 마다한 전씨는 아내 옆으로 와서 쩝쩝 소리를 내며 상추쌈을 먹었다.
'가족 총출동' 팀도 있다. 주자 송근중씨의 아내 송인희(48)씨와 세 딸 보람(24), 아리(23), 지예(21)씨, 그리고 강아지 '까미'다. 그들은 해남 땅끝 마을에서부터 둘째 딸이 운전하는 12인승 승합차에 쌀 양념 라면 담요 베개 옷 등을 가득 싣고 6박 7일을 동행했다.
아내 송인희씨는 잠도 제대로 못 잔 채 매 끼니 10인분 이상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일주일을 보냈다. 그는 "(남편)혼자만 먹게 할 순 없잖아요. 뛰는 사람이 한 사람이 아닌데"라며 승합차에 쌓인 과일이며 라면 쌀 등을 가리켰다. 한번은 전복죽 한 솥을 끓였는데 앞선 주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정작 남편은 뒤쳐져 들어오는 바람에 한 숟갈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한 밤에 비 쫄딱 맞은 주자들이 당도한 CP에서 마라톤 동호회 자원봉사자들은 미역국, 황태국에 뜨끈한 밥을 말아 대접했다. 길 위에서는 주자들끼리 배낭 속 홍삼이며 육포 따위를 나눠먹는 일도 대회 내내 이어졌다.
▲ 다시 9월을 기다리는 사람들
7월 13일 대회 마지막 날 오전 5시 30분, 김동진(54)씨는 강원 고성군에 있는 600㎞ 지점 CP가 자리잡은 민박집 방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지난 밤 그는 낙오했다. CP 제한시간까지 그가 못 미친 30여㎞의 거리는 그에게 그랜드슬램까지 남은 거리였다.
"100㎞ 구간 초장부터 몸이 안 좋았는데…. 진부령 오르막길에서였나, 잠에 너무 취하다 보니 발이 안 맞더라구요."
김씨가 대회 지원차량에 탑승한 것은 그의 기억과 다르게 진부령 정상에서 15㎞나 지나 온 내리막 지점이었다. 당시 김씨를 차량에 태운 CP담당자는 그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시 도전 하실 거에요?
"그건 좀…, 알 수가 없죠. 어려운 구간 여기까지 왔으니 다른 분들은 모두 잘 해내리라 믿어요. "
낮 12시. 대회가 끝났다. 대회에 참가한 81명 중 33명이 완주했다. 이들 중 11명은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50대 참가자가 56명으로 가장 많았고 40대가 12명, 60대가 10명이었다. 30대가 1명, 70대도 2명이 있었다. 오는 9월 26일부터 시작되는 강화~강릉 308㎞ 국토 횡단 마라톤에는 8월 15일 현재 121명이 참가 신청서를 냈다.
홍천ㆍ인제ㆍ고성=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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