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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20년]과천 아파트 빌려 두 달간 감금 생활 "여기 하와이 날씨는…" 기만 작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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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실명제20년]과천 아파트 빌려 두 달간 감금 생활 "여기 하와이 날씨는…" 기만 작전도

입력
2013.08.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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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12일은 대구와 춘천의 보궐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국민의 이목이 선거결과에 쏠려 있던 오후 7시45분 텔레비전 뉴스에 갑자기 등장한 김영삼 대통령은 상기된 목소리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표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해방 이후 가장 충격적인 경제조치로 꼽힌 금융실명제가 전격 발표된 것이다. 발표 한달 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대통령을 포함한 4명에 불과했다. 발표 당일에도 준비팀 20명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 만큼 금융실명제 작업은 준비부터 발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이 비밀리에 이뤄졌다. 사전에 정보가 새나가면 금융계가 일대 혼란에 빠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같은 해 5월로 거슬러간다. 이경식 경제부총리(이하 당시 직책), 홍재형 재무장관, 김용진 세제실장, 김진표 세제총괄심의관 등은 상부의 비밀지시로 금융실명제 준비에 착수한다. 이들은 먼저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보안이 누설되면 언제든 옷을 벗겠다는 각오였다.

정식으로 지시가 떨어진 것은 7월8일이었다. 이때부터 재무부와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선발된 비밀 요원들이 준비팀을 꾸렸다. 서울 대치동에 마련한 사무실의 공식 명칭은 '국제투자연구원'이었다. 7월28일부터는 24시간 합숙이 시작됐다. 정부 예산을 쓸 수가 없어 핵심 멤버 4명이 450만원을 모아 밤샘 작업을 위해 과천 주공아파트 505동 304호를 두 달 간 빌렸다. 홍재형 장관은 "남북통일연구 용역으로 위장한 탓에 팀원들은 실명제 준비를 '남북통일작전'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재무부 외자정책과 최규연 사무관과 관세정책과 임동빈 사무관, 소득세제과 임지순 과장 등은 24시간 합숙을 위장하기 위해 장기 해외출장 명령이 내려졌다. 실명제 추진 실무자들의 해외출장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언론은 "실명제 실시는 빨라야 내년"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양수길 경제부총리 자문관은 "낮에 사무실에 전화해서 '여기 하와이 날씨가 어떻다'고 하면서 기만작전을 펼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들은 숙소 베란다에 나가는 것도 금지됐다. 사실상 감옥살이와 다름없었다. 김진표 세제총괄심의관은 "가장 고역은 먹는 일이었다"며 "외부에서 눈치 챌까 싶어 직접 음식점으로 가서 배달통에 담아 자전거로 옮기곤 했다"고 말했다.

출퇴근을 하는 이들은 보안 유지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세제실 소속이 아니었던 진동수 해외투자 과장은 실명제 준비 사실을 직속상관에게까지 비밀에 부쳐야 했다. 진 과장은 "오전에는 정상 출근했다가 직원들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오후에 나와 실무진 아파트로 갔다"고 말했다.

실명제 발표일이 정해지자 문서들의 인쇄 작업도 문제였다. 지하에 인쇄소가 있어 보안이 유리한 범신사가 선택됐다. 하루 전날인 11일 인쇄소 직원 7명을 뽑아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당시 출입문을 지키며 보초를 서던 이는 백운찬 사무관이었다.

8월12일 실명제가 발표되자 금융시장은 적지 않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틀 동안 증시는 하한가로 치달았고, 거래대금은 평소 10분의 1로 줄었다. 명동 사채 시장이 붕괴돼 중소기업이 줄도산할 것이란 '10월 대란설' 등의 루머가 떠돌았다. 하지만 증시는 6일 만에 정상을 되찾았고 1년 이상 상승세를 이어갔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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