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작가 권윤덕(54)씨는 2007년 '한·중·일 평화그림책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 나라 그림책 작가 12명이 '평화'를 주제로 한 그림책을 그려 3국에서 동시 출판하는 프로젝트다. 평화그림책이라는 말에 권 작가는 "늘 그리고 싶었지만 엄두를 못 냈던 그것"을 떠올렸다. 일본군 위안부 심달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한 그림책이었다. 증언집 에서 읽었던 심 할머니의 생생한 목소리를 그는 그림으로 그렸다.
2007년 권 작가가 심 할머니를 처음 만나 시작한 그림책 는 2010년 심 할머니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완성됐다. 그 사이 권 작가가 쓴 연습종이만 3,729장이었다.
그러나 일본측 출판사 관계자들은 완성된 를 보고 낯빛이 바뀌었다. 일본 정부가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주제의 그림책을 일본에서 출판하겠다니 그럴 법도 했다.
처음엔 "일본 내 우익세력이 반발할 우려가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출판사측은 시간이 흐를수록 갖은 핑계를 댔다. "어린 아이들도 보는 그림책인데 내용이 적합하지 않다"고 나올 때는 울분을 참기 어려웠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여기서 포기하면 네가 지는 것"이라고 만류했다. 권 작가는 버텼다.
천황에 대한 묘사, 위안소 도면 등 일본 출판사측의 수정 요구를 받아들여 그림을 고쳤다. 어쨌든 일본에서 빛을 보게 하자고 되뇌었다.
가장 큰 고비는 강제연행 장면을 놓고 대판 싸움이 붙었을 때였다. 권 작가가 일본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심 할머니를 끌고 가는 것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일본 출판사는 남성들의 옷차림을 민간인 사복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출판이 곤란하다고 맞섰다. 심 할머니가 증언집에 남긴 "커다란 사람 두 사람이 와서 언니와 나를 데려갔다"는 증언에 군인이라고 명시돼 있지 않다는 이유였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지만 심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다.
"일본에서는 아직까지 일본군 위안부가 우리나라 민간인들에 의해서 자행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림책에서 소녀들을 강제연행하는 등장인물들의 옷차림 하나에도 예민한 거죠." 결국 권 작가는 모자에서 일장기를 지우는 대신 옷의 형태나 색감으로 군인을 추정할 수 있도록 타협을 했다. 이것을 끝으로 일본판 그림책 수정은 마무리됐다. 3년만이었다.
권 작가는 얼마 전 다시 일본 출판사로부터 "최근 일본 우경화가 더 심해져 올해도 출판이 어렵다"는 메일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일본에서도 평화의 메시지를 그림으로 펼쳐 보일 것으로 믿고 있다.
15일 광복절을 맞아 전국 20개 영화관에서 개봉하는 다큐멘터리 '그리고 싶은 것'은 이렇듯 지난한 일본 출판 과정을 담았다. 권효(34) 감독조차 "한·중·일에서 그림책 한 권이 나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고 말했다. 제작비 2,100만원은 시민들이 소셜펀딩으로 모았고 수익금 일부는 대구에서 추진 중인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 기금 등에 보탤 예정이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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