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긴급명령으로 전격 시행된 금융실명제는 당시 정부 부처와 국책연구기관의 핵심 브레인으로 꾸려진 11명의 '비밀 작업반'에 의해 탄생했다. 이들은 당시 두 달 넘게 사실상 감금 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경제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사건을 기획했다. 이들 가운데 장관급이 5명, 차관급이 2명이나 배출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는 평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도 금융실명제는 과거의 골격 그대로다. 그만큼 변화한 경제상황에 맞게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금융실명제를 설계했던 원조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들로부터 금융실명제의 현재적인 의미와 개선 방향을 들어봤다.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비밀 작업반을 진두 지휘한 홍재형 전 국회 부의장은 "금융실명제 도입은 당시 경제팀과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홍 전 부의장은 "금융실명제는 이미 1982년부터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전 정권에서 두 번이나 도입을 시도했지만 극심한 반대로 무산됐다"며 "실제로 일본처럼 아직도 실명제를 도입하지 못한 나라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하지만 압축 성장 과정에서 저축을 늘리고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비실명 관행을 눈감아 줬던 해묵은 관행을 끊을 때가 됐다는 경제팀의 견해와 임기 초였던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맞아 떨어져 전격적인 시행이 가능했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이들의 자긍심은 대단했다. 세제총괄심의관으로 금융실명제 도입 주도한 김진표 민주당 의원은 "금융실명제 실시로 불법적인 재산 축적이 어렵게 됐고 조세부담의 형평성이 높아졌다"며 "음성적인 지하 정치자금의 흐름을 막아 깨끗한 정치 풍토를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사무관으로 실무를 맡았던 최규연 저축은행중앙회장은 "20년이 지났지만 아직 수정을 안 한 것은 그만큼 당시에 제대로 만들었다는 반증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당시 재무부 세제실 소득세제과 사무관이었던 백운찬 관세청장도 "법적으로 강제해서 실명으로 계좌를 트게 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었다"며 "금융실명제가 우리 사회를 투명하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재무부 과장이었던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은 "우려했던 경제 혼란이나 시장 혼란은 사전에 다 예측하고 준비했기에 큰 부작용은 없었다"면서도 "거래를 실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많이 발생해 보완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고 덧붙였다.
최근 '제 2의 금융실명제'로 불리는 차명계좌 금지법 등의 도입 움직임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차명거래 전면금지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악의가 없는 일반 국민의 불편을 대거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규연 회장은 "최근 차명거래 전면 금지 법안이 나와있으나 이를 실시할 경우 득보다 실이 많을 것"이라며 "당시에도 많이 고민했으나 선의의 차명 거래가 많아 이를 전면 금지하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홍 전 부의장은 "역사적으로 차명거래 금지는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도 모두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며 "차명계좌를 없애면 보유 현금을 달러로 대체하는 등 다른 수단이 나타나게 돼 있다"고 지적했다. 김진표 의원은 "금융기관 창구 직원이 어떻게 검찰이 취조하듯이 고객에게 누구 돈인지 증명하라고 하겠느냐"며 실현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다.
실명법이 아닌 다른 관련법을 통해 처벌과 규제조항을 확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조언도 나왔다. 홍 전 부의장은 "금융실명제법은 검은 돈이 나중에 노출되기 쉽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세법이나 정치자금법 등을 통해 차명 거래를 제한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차명거래를 하고 싶은 사람도 언젠가 들통나 불이익이 엄청나다고 생각해 안 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차명거래를 악용하는 일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만큼 이를 보완하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백운찬 청장은 "차명으로 금융소득 종합과세를 피해가는 경우가 많다"며 "금융기관에 수사권을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금융기관 종사자뿐 아니라 차명거래를 하는 당사자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현행 제도에서는 차명거래를 원 주인이 계좌 명의인에게 증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을 증여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으로 전환하면, 차명거래 만연 현상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며 "정치권 등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어 합리적인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진동수 전 위원장은 "금융실명제가 기여한 부분과 하지 못한 부분을 종합적으로 따져가며 개정을 추진하는 게 좋을 것"이라며 "지금은 실명제 도입 당시와 다르게 관련 법제도 잘 돼있는 만큼 정치적 접근보다는 정책적막? 제도와 행정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