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일, 진짜 신문을 만들기 위해 거의 두 달 동안 투쟁했던 한국일보의 기자들을 마음으로 응원했다. 나는 이 원고를 다시 쓸 수 있는 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한국일보에 기고를 한 지난 1년 반, 곁에서 본 한국일보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는 그 동안 그것이 단순한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 입장에서 원고료가 오랫동안 미지급 되는 일에 서운함도 느꼈다. 하지만 6월 15일 사측의 일방적인 편집국 폐쇄로 편집권을 박탈당한 후 한국일보 사태를 전부 알았을 때, 오랜 시간 편안하게 신문을 만들지 못했던 한국일보 기자들의 노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주의 일방적인 무능한 경영, 그리고 200억 원에 달하는 커다란 금액의 배임을 지켜보면서도 겉으로 크게 티내지 않고 더 좋은 신문을 위해 고민했을 기자들의 인내심은 빛났다. 창간 이후 59년, 어쩌면 이번 58일의 투쟁은 작은 능선 하나를 넘었을 수도 있다. 좌우 편향보다 스스로의 온도를 지키던 한국일보가 다시 자신의 온도를 잘 찾아 늘 있던 그 자리에 있기를 기대한다.
요즘 매주 말 시청광장에서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촛불집회를 가지고 있다. 얼마 전 철탑에서 농성하던 현대차 노조원이 다시 땅을 밟았으며 대한문 앞에서는 언제 구청 직원들의 철거가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이고 있다. 또 국정원을 대상으로 하는 국정조사도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잘 모른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떤 논의들이 오가는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른다. 역대 최장 장마와 기록적인 폭염, 그리고 전력난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단지 날씨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이렇게 언론들은 좀 더 다양한 일들에 전혀 시선을 주고 있지 않다.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해준다던 언론들은 지금 다들 어디에 있는가? 솔직히 답답한 심정이다.
사실 한국 언론은 위기에 봉착해 있다. 신문사의 편향된 시선과 국민 앞에 벌어지는 현안을 구분하지 않는 보도와 사설, 논평으로 특정세력을 제외하면 독자들에게 신문이라는 매체는 각종 사건사고의 소식통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지금 대한민국의 신문이라는 매체는 이념적 진영논리 안에서 일종의 판을 짜기에 바쁘다. 더 이상 젊은 독자들은 신문에 대한 신뢰가 없다. 신문은 오히려 대립과 갈등, 분열을 조장하고 소문의 진원지가 됐기 때문이다. 언론신뢰도 조사를 봐도 이런 결과는 드러난다. TV매체가 과반수 이상, 나머지도 인터넷 매체에 신뢰도를 빼앗긴 지 오래되었다. 물론 활자보다 영상이 강한 미디어 사회의 진입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현실적 문제가 있다 치더라도 신문이 신뢰도를 잃은 것은 사회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다. 신문, 그러니까 언론은 보도의 원론적인 본질보다 자본, 흥미성, 그리고 권력과 끈끈한 유착이 스스로 침몰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균형감각과 공정성은 모든 매체에 중요한 것이지만 특히나 신문이 가져야 할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어떤 언론에도 균형감각과 공정성은 없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한국일보에 당부하고 싶다. 언론인을 준비하는 사람들 이외, 신문을 떠난 젊은 사람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신문이 한국일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창간 이후 59년 한국일보는 스스로의 온도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갑지 않았으므로 비교적 냉정하게 세계에 벌어지는 현안을 독자들에게 보도할 수 있었다. 독자들은 더욱 냉정하고 차가운 시선으로 살고 있는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일보가 그런 온도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이번 투쟁으로 아마 많은 것들이 변화할 것이다. 그 큰 변화의 중심에서 좀 더 다양한 시선들로 국민들의 알 권리를 지켜줬으면 좋겠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좀 더 좋은 신문을 만들기 위한 58일의 투쟁, 아마도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천정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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