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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체 문장의 긴장감·치밀한 구성 '깊은 흡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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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체 문장의 긴장감·치밀한 구성 '깊은 흡인력'

입력
2013.08.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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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33)라는 소설가의 이름이 믿을 만한 평론가들의 입에서 꽤 자주 나왔다. 눈여겨보고 있는 젊은 작가를 물으면, 첫 번째, 못해도 두 번째쯤에서는 꼭 손보미가 나온다. '도대체 누구길래?'라는 의문과 '얼마나 잘 쓰나 볼까'하는 못된 심보로 그의 첫 책 (문학동네 발행)을 펼쳤다. 그리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날 약속을 잡았다.

잠시 의례적인 소개부터 하자면, 국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던 그는 박사 과정이던 2011년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서른 한 살이었으니 늦었다면 늦은 등단이다. 하지만 그 이듬해 사건이 벌어졌다. 문학동네가 신진과 기성을 아울러 선정하는 '제3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책 한 권 없는 그가 덜컥 받은 것이다. 올해는 대상 바로 아래 '젊은작가상'을 받았고, 9편의 단편을 묶은 첫 소설집을 마침내 선보였다. 그와의 만남은 '삶의 파열을 드러내는 단편의 전형' '치밀한 구성과 비밀스러운 결말의 묘미' '영리한 기미의 포착자''알기에 입을 다무는 세련된 침묵' 같은 문단의 상찬을 검증하는 형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제가 만약 5년 전에 등단작을 투고했더라면 아마 떨어졌을 거예요. 제 소설을 두고 같이 공부하던 선후배들은 늘 '근본이 없다'고 비판했거든요. 그 근본 없음을 오히려 새롭게 봐주신 게 아닌가 싶어요."

여기서 근본 없음이란 아마도 '한국 소설의 전통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는 의미일 테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번역체 문장이 빚어내는 소격과 긴장의 효과다. 한국어 문장이 어색하다는 의미의 번역투가 아니라 실제 외국어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해낸 것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게 계산되고 의도된 번역체가 손보미의 문장이다. 생소하면서도 신선한 인상은 주로 여기서 기인한다.

"이 글은 브라이언 그린 박사가 2012년 1월호에 기고한 을 번역ㆍ정리한 것이다"로 시작하는 '과학자의 사랑'이 대표적이다.한국 사회라는 사회 지리적 맥락이 소거된 이 번안된 전기물은 한 과학자의 생애를 허구의 언어로 복구하는 과정을 통해 그의 소설적 관심이 소설이란 무엇인가 묻는 데 상당히 기울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편이 친구의 아내와 다리 밑에서 입 맞추는 모습을 본, 혹은 보았다고 믿는, 여자의 붕괴되는 내면('육인용 식탁'),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내의 활발한 공연 재기를 불륜의 구실로 오해하는, 정작 본인이야말로 불륜의 문턱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남편('침묵'), 서로 불륜을 의심하면서도 수 년째 '그 질문'을 씹어 삼긴 채 살아가는 부르주아 부부('폭우'). 이들의 파열된 관계가 정확히 어떤 팩트에서 비롯된 것인지 작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설명과 규정 대신 침묵과 기미로 암시할 뿐인 그의 소설 작법은 알고 보면 질투의 화염에 휩싸인 게이의 상투적인 이야기일 뿐인 '달콤한 잠-팽 이야기'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함께 사는 이 두 남자가 게이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연인인지 친구인지, 미국 소도시의 유명 스트리퍼를 자해하게 만들었던 실연의 가해자가 그인지 전혀 다른 그 누구인지, 구체적인 정보를 고의적으로 누락함으로써 소설은 색다른 긴장과 몽환적 분위기를 유발한다. 그가 탁월한 소설공학적 기량을 갖춘 테크니션임을 부인할 수 없다.

가슴보다는 머리로 쓰는 작가 같다는 인상을 전했을 때, 그의 얼굴에 떠오른 건 뜻밖에 예쁜 눈웃음이었다. "제 소설을 두고 구성이 치밀하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시는데 사실 의도적인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전 조금 엉성하더라도 마음으로 느껴지는 소설을 쓰고 싶거든요."

마음을 건드리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윤대녕을 읽으며 '소설이란 건 이런 거구나'를 배웠다는 그의 말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됐다. 하지만 그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친 건 레이먼드 카버나 존 치버 같은 미국 작가들이라고. 대학교 3학년 때부터 부부 이야기를 줄곧 써서 '진정성 없다'는 욕을 먹었던 건 전적으로 카버 탓이다.

"부부는 인간 관계의 총화를 함축한 정말 흥미로운 관계 같아요. 파국 앞에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연인과는 질적으로 다른 재미있는 관계죠. 그래서 자꾸 쓰게 되는 것 같아요."

대학 시절 소설 쓰기 동아리에서 만난 그의 오랜 연인 역시 소설가다. 지난해 등단해 올해 젊은작가상 대상을 받은 김종옥(40) 작가. 비보도 약속을 어기고 '커플의 쾌거'로 대서특필한 한 일간지 때문에 이제 감추려야 감출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린디합은 스윙댄스의 한 종류로, 손보미는 극심한 우울 속에 빠져 있던 5년 전부터 이 춤을 배웠다. 종종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댄스 파티에 가기도 한다. "몸치라 잘 추지는 못하지만, 파트너의 작은 신호에도 다르게 반응하는 법 정도는 익힌 수준"이다. 춤처럼, 소설도 당연히 기술이다. 손보미는 일단 탁월한 기술력을 갖췄다. 그가 더 뜨거운 세계를 발굴해낼 수 있다면, 그 사건은 '파란' 정도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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