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확실히 사랑에 빠진 듯 보였다. "농현을 할 수 있는 가야금의 매력은 서양 악기와 구분되는 특징"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화음이 없는 대신 여음이 있어 한 음 한 음이 사람의 목소리 같다"고 말할 때는 생기가 넘쳤다. 가야금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는 그의 이름은 알래스카 태생의 미국인 조세린(43). 본명은 조슬린 클라크다. 가야금에 매료돼 한국에 온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12일 만난 그는 '외국인 가야금 연주자'라는 호기심 어린 수식어 정도로는 설명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연주 실력을 인정 받아 2011년에는 가야금 독주회까지 열었다.
조씨는 31일 남산골한옥마을에서 열리는 연주회 '화이락'(和以樂)에 출연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이 수준 높은 전통문화의 원형을 널리 알리기 위해 8월 한 달 간 매주 금, 토요일 오후 7시 30분에 여는 무료 공연 프로그램 '한밤의 풍류마당'의 일부다. "외국인의 입을 통해 한국 음악의 객관적 이해를 돕고 공감도를 높인다"(한덕택 남산골한옥마을 예술감독)는 기획 취지에 따라 전통예술계의 명인, 명창들과 더불어 이번 공연에 초청됐다. 조씨 외에 힐러리 핀첨 성(해금), 라이언 캐시디(판소리), 핸드리케 랑에(타악)씨가 같은 날 무대에 선다. 조씨는 "외국인이라서 비슷한 실력의 한국 연주자보다 연주 기회가 많은 것 같아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무대에 선다"고 말했다.
"내 마음과 내 자리가 다르다는 걸 잘 알아요. '외국인치고 잘하는 연주자'가 아닌 진짜 실력 있는 예술가가 되고 싶지만 어려서부터 가야금을 접한 한국인 연주자와 같은 수준에 오르기는 쉽지 않겠죠. 하지만 '가야금 전도사'로 불리며 많은 연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무척 의미 있는 일이에요."
일찌감치 바이올린과 피아노, 클라리넷과 오보에까지 다양한 악기를 섭렵한 조씨는 태평양전쟁과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이역 만리 동아시아에 친근감을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일본의 전통악기 고토와 중국의 쟁을 익혔다.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92년. 이지영 서울대 교수에게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해 지애리, 강정숙 선생을 사사했다. 지성자 선생에게는 가야금산조를, 강은경 선생에게는 가야금병창을 배웠다. 황병기 선생에게 현대음악을 배운 적도 있다.
그에게 소리란 "서양 악기, 동양 악기 할 것 없이 도달하는 방법은 달라도 목적지는 같은 하나로 통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다룰 수 있는 많은 악기 중 가야금에 집중한 것은 나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가야금과 한국이 나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무엇이든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한 동아시아학 공부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하버드대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박사 논문의 주제는 당연히 한국 전통음악. "공부의 시작은 순전히 연주를 위한 목적이었어요. 미국에서 연주 기회가 있어 프로그램에 글을 쓰려고 보니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하겠더군요." 그는 현재 배재대 문화예술콘텐츠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사랑이 깊어지면 애정 어린 쓴소리도 잦아지는 법. 그는 한국인이 대중화의 기치를 내걸고 국악을 가벼이 여기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국악은 깊은 맛을 느끼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인내가 필요하지만 그만큼 위대한 예술이에요. 연주자들조차 이를 관객에게 이해시키려 하지 않고 가벼운 무대에 치중하는 듯해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는 또 국악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데 대해 "기독교 선교사를 중심으로 현대 교육 체계가 한국에 도입되다 보니 무속신앙과 연관이 깊은 한국 전통문화의 중요성이 오랫동안 간과돼 온 것 같다"는 분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으며 가야금을 만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든 때도 있었지만 막상 미국으로 돌아가면 금세 한국이 그리워지곤 했다"는 조씨에게 꿈을 물었다.
"한국 전통음악을 꾸준히 공부하고 국악으로 현대음악도 열심히 하는 거죠. 지금이 바로 꿈대로 살고 있는 거예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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