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갈등을 제도권에 수렴하여 현재(顯在)화 함으로써 합의점을 모색해 나가는 체제다. 같은 논리선상에서 균열과 반대를 제도화한 것이 민주주의이다. 민주주의를 어찌 보는가는 시대에 따라, 관점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함의를 품고 있는 민주주의의 어떤 논리를 동원해도, 민주주의와 민생이 배치되거나 상충되는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부패가 민주주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것인지, 정치적 퇴행이 부패의 토양을 제공하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 둘이 연계되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민생은 국민의 삶이다. 정치는 국민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 삶의 결은, 국민 각자가 다르고, 따라서 갈등과 균열이 상존한다. 단순하게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기에 정치가 존재한다. 권위주의 정권 때 민주주의는 질식됐고, 정치는 실종됐다. 권위주의 정권의 권력 엘리트들도 민생을 입에 달고 다녔다. 태생적으로 정당성의 위기에 노출될 수 밖에 없던 정치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정치를 배제하고 빈곤 퇴치의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억압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먹고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판에 왜 그토록 우리 국민은 '절차적'의미의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아스팔트로 나섰던가. '민생'이 모두 해결됐기 때문인가?
한미 FTA 비준에 반대하여 장외로 나갔던 2011년 이후, 20개월 만에 제1야당이 천막을 쳤다. 여당은 야당이 민생을 외면하고 거리로 나갔다고 질타한다. 민주당내 강경그룹에 떠밀려 장외를 선택했다고 비난한다. 대선불복의 수순을 밟는 것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국정조사를 의도적으로 파행시키려 했다고 공격한다. 여야는 표면적으로만 정상화된 국정조사의 파행을 상대방에게 떠밀기 급급했다. 당연히 양비론(兩非論)적 접근이 형식논리상 정합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양비(兩非)는 결국 사태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지난 해 집권여당의 정문헌 의원이 뜬금없이 NLL 문제를 꺼냈고, 그 문제를 대선 기간 내내 뜨거운 논란이 됐다. 그리고 다시 그 문제가 촉발됐다. 여야 갈등은 기본적으로 정쟁적이다. 그러나 본질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과 국정원 개혁이다.
국정원 국정조사가 합의되는 시점에 국정원이 정상회담 대화록의 발췌본을 공개했고, 그것도 모자라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정원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며 대화록 전문을 공개했다. 국정원이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실질적으로 국회의 권능인 국정조사를 무력화하려는 것이었다는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이후 전개된 국정원 국정조사 정국에서 보여준 새누리당의 태도에서 국정원 대선개입의 진상규명과 개혁에 대한 의지를 찾는 것은 부질없어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원 자체 개혁 주문'이 거의 유일하다. 진보 성향 정권 때의 국정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이 핵심이고 진실이다. 국정원 개혁이 민주주의의 문제와 직결되는 접점은 여기서 출발한다. 야당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 당내 친노 그룹의 정치적 이익을 앞세운 대화록 공개 주장은 그 방증이다. 민주당은 국정원 국정조사에 천착하지 못했다. NLL 논란의 당리당략적 유불리를 저울질 하는 것은 그래서 정치공학적이기 전에 몰정치적이다.
장외로 나간 야당이 내세운 명분은 '민주주의의 회복과 국정원 개혁'이다. 국정원이라는 국가의 최고정보기관이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당위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민생이다. 지금은 절대빈곤의 추방이라는 명분과 반공주의적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메커니즘으로 국민을 교묘히 속여서 자신들의 절대권력을 공고히 했던 시대가 아니다. 이른바 '민생'담론으로 정치를 형해화(形骸化)화했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시대가 아니다. 비록 소수지만 교수들의 시국선언과, 일부라고 몰아붙이지만 '광장의 촛불'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갈등'에 정치이념적 갈등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보'에 군사적 안보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민생'에도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민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와 '민생'은 일란성 쌍생아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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